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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멘토인 줄 알았는데, 배운 건 나였다

by 오박사

학습리더 교육을 마치고 복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학습모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상은 신임 순경 네 명. 학습모임의 취지와 의미를 설명한 뒤,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다음 날까지 카카오톡으로 답을 달라고 했다. 마음 한편엔 걱정이 들었다. ‘아무도 연락 안 하면 어쩌지?’ 나는 자기 계발과 성장을 목표로 두고 있었지만, 갓 입직한 그들에게까지 그런 간절함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 날, 비슷한 시간대에 네 명 모두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모두가 학습모임에 함께하겠다고 한 것이다. 고마움과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곧장 단체 채팅방을 만들고, 일주일 뒤 첫 모임 날짜를 정했다. 모임의 운영방식과 활동 내용을 함께 정하기 위함이었다.


첫 모임은 저녁 7시, 경찰서 2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 모두가 참석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모임 이름을 정하는 것이었다. 각자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안한 후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여러 이름이 오갔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폴리피아’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그 순간, 마치 번개가 번쩍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경찰(police)과 밀양의 캐치프레이즈인 ‘미르피아’의 합성어. 나만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아니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에 들어 했고, 결국 모임의 이름은 '폴리피아'로 결정되었다.


다음은 무엇을 할지 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모두가 같은 책을 읽고, 감명 깊은 문장을 열 개씩 골라 그 이유를 함께 나누는 활동을 제안했다. 같은 책을 통해 각자의 시선을 공유하자는 취지였다. 이번에도 모두 찬성했고, 책은 각자 추천한 뒤 투표로 선정하기로 했다.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진행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척척 진행되었고,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조차 너무 즐거웠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우리는 아쉬움을 안고 다음 모임을 기약했다.


다음 날, 첫 책으로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가 세 표를 얻어 선정되었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눈다는 사실이 기대됐고, 후배들이 어떤 문장을 골랐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나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한 장 한 장 형광펜으로 줄을 긋고, 후보 문장을 골라 포스트잇을 붙이며 열심히 읽었다. 최종적으로 20여 개의 문장 중에서 열 개를 뽑고, 그 이유와 느낀 점을 정리해 타이핑까지 마쳤다. ‘이 정도면 내가 제일 잘 한 게 아닐까?’ 하는 호승심도 생겼다. 어린아이처럼 내 결과물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근질거렸다.


드디어 두 번째 모임 날. 모두가 각자 정리한 프린트를 준비해 와서 서로 나누어 가졌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이 고른 문장과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런데 후배들의 발표를 들으며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고른 문장들은 대부분 저자가 강조해 놓은 부분, 즉 굵은 글씨나 밑줄이 그어진 문장들이었다. 당연히 중요한 문장이라 생각했고, 거기에 내 생각을 덧붙이며 나름대로 해석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한 후배가 고른 문장은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들이었다. 저자의 강조와는 무관하게, 조용히 숨어 있던 문장들. 그의 해석은 신선하고 깊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찾을 수가 있지?’ 감탄과 동시에 자신만만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날 나는 ‘다른 시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제대로 배웠다. 사실 학습모임을 만든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멘토가 되어 이끌어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학습모임을 만들길 정말 잘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로 나도 숨은 문장을 찾기 위해 더 집중해서 책을 읽었고, 책 읽는 재미는 더 깊어졌다.


이후로도 우리 모임은 1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두 명의 후배가 인사발령으로 수사과로 이동했고, 모두가 바빠지면서 더 이상 시간을 내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독서만으로는 점점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면서 서서히 빠지는 이들도 생겼고, 모임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1년은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의 거울이 되었고,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 후배들의 앞날에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거름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내 역할을 충분히 다한 셈이다. 이제 나는 또 다른 재미를 찾아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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