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경찰청에서 동료강사 제도가 처음 생긴 뒤, 강사들의 발전과 사기 진작을 위해 2013년부터 전국 동료강사 경진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대회 장소는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방식은 각 경찰청을 대표하는 강사 1인이 10분 강의를 하고, 100명의 청중단이 투표 버튼을 눌러 점수를 집계하는 방식이었다.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의 점수 집계 방식을 본뜬 덕에, 대회는 긴장감과 재미가 넘쳤다.
나도 1회 대회에 청중단으로 참석했다. 대강당에는 500여 명이 들어차 있었고, 무대는 조명과 대형 스크린으로 웅장함을 자랑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강의하는 강사들을 보는데,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뜨거워졌다. ‘나도 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이 밀려왔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1회 대회는 첫 시도라서인지 참가자들의 강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나도 입상 가능성이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2회 대회에는 꼭 참가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내 강의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이 좋았기에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1년을 준비한 끝에, 2회 대회를 앞두고 경남경찰청에 참가 의사를 밝혔다. 다행히 경쟁자가 없어 경남청 대표로 출전하게 됐다. 그때부터는 하루하루가 설렘이었다. ‘경남 촌구석에 오종민이라는 강사가 있다’는 걸 전국에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이번 대회부터는 100명 청중단 투표가 아닌, 전문 심사위원 4인의 점수 합산으로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실력만 있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다수의 청중에게 직접 검증받고 싶었던 나로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대회 전날, 참가자들은 인재개발원에서 사전 리허설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강의 핵심은 감춘 채 견제하는 분위기였다. 총과 칼만 없을 뿐, 이미 전쟁은 시작된 셈이었다. 다음 날, 청중단이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하자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발이 떨렸다. 미리 준비해둔 우황청심환까지 삼켰지만, 떨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회자가 대회 시작을 알렸다. 17명 중 내 순서는 11번째. 5~6번째를 원했지만, 제비뽑기 결과는 냉정했다. 앞선 강사들의 발표를 보니 1회 때보다 수준이 훨씬 높아졌다. 내심 4위 안에는 들 것 같았지만, 긴장은 더욱 커졌다.
드디어 내 차례. 무대에 오르자 떨림과 설렘이 동시에 몰려왔다. 크게 숨을 내쉬고 강의를 시작했다. 10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청중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다리를 꼭 잡아 떨림을 숨기며 무대를 내려왔다.
모든 발표가 끝난 뒤,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집계했다. 20분 뒤 6위부터 1위까지 역순으로 발표됐다. 4위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자 기대감이 부풀었고, 쉬는 시간에 다른 강사들로부터 호평까지 들었으니 자신감은 최고조였다. 하지만 끝내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순간 충격이 컸고, ‘만약 1회 대회처럼 청중단이 평가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결과가 나온 이상, 미련을 가져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부족했으니 더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내긴 아쉬웠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다시 무대에 서고 싶었다. 다만, 내년에 경남청에서 또 기회를 줄지가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속으로는 다짐했다. “이대로 물러서진 않는다. 반드시 다시 서서, 복수의 칼날을 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