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 슬픔을 위로해준 적 있어?!

서른부근의 어느 멋진 날들

by 이용현

여자의 고함이 창문을 타고 방으로 흘러들어온 아침이었다. 소리가 큰 나머지 여자의 비명 소리는 갈라지고 미세하게 깨졌으나 내 귀에 꽂힌 말은 정확했다.


"네.가. 내. 슬.픔.을 위로해 준 적... 이써어어어어!엇!"


어렸을 때 부모님이 싸우거나 간혹 옆집에서 부부의 싸움 소리가 들릴 때 들을 수 있던 여자의 절규. 그것은 더이상 여자의 목소리라고 하기보다는 분에 찬 나머지 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한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난 뒤 여자는 뭐라뭐라 소리 질렀지만 더이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출근 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내 슬픔을 위로해준 적 있냐는 절규.


누군가 내 앞에서 내 슬픔을 위로해 준 적 있냐며 분개할 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똑같이 얼굴을 붉히며 그럼 너는 나를 위로한 적 있냐고 따질 것인가. 너만 슬펐냐, 나도 슬펐다며 대꾸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미안하다며 상대를 껴안고 펑펑 울 것인가.


다양한 행동을 생각했지만 좀처럼 어떤 액션이 좋겠다는 결론은 내지 못했다.

다만 인간은 외로운 존재구나. 그리하여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고 슬픔이 있을 때 그 슬픔을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연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에게 퍼붓던, 내 슬픔을 단 한 번이라도 위로해준 적 있냐는 말은 어쩌면 나는 당신에게 위로받고 싶었는데 내 슬픔을 가까이에서 헤아려주지 않았다는 배신감. 실망. 기대에 못 미친 한의 절규였을 것이다.


아주 가까이 있는 당신이라서 자주 기대고 알아주길 바랐는데 당신에게 기댄 감정이 고작 이거였느냐는 말과 같았을 것이다.


내가 아주 힘이 들어 위로받고자 할 때 과연 내 슬픔을 온전히 위로해주거나 모든 감정을 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감정 상태를 이해할 순 있어도 완전히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나머지 상대 앞에 의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 상대가 내 슬픔을 전부 다 위로해주기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살아온 환경이 조금씩 다른 우리들의 생각이 똑같을 수 없다. 생각의 밀도가 다를 수 밖에 없다.


단, 근사치에 가까운 위로로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그 이상의 값을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눈을 뜨고 잠을 자는 사이에서 내 슬픔을 위로해준 적 있냐는 말이 꽤 아프긴 하다.


그러나 위로할 수 없다.

내 슬픔을 상대가 전부다 알 리 없다.

바라는 기대만큼 채워줄 수 없다.


오래 보았다고 해서, 함께 살았다고 해서 개인 감정은 다른 사람이 완벽하게 치유할 수 없다. 알아차릴 수 없다.


그렇다면, 여자가 아침부터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 지를 일이 없다.


네가 내 슬픔을 위로해준 적 이써어엇!!!


글 사진 이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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