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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현 Mar 04. 2018

우는 장면을 목격한 자

다시, 엄마를 사랑할 때.

엄마는 자주 울었다. 자주 웃는 만큼이나 반대로 눈물을 많이 흘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끔 그녀는 한 손을 이마에 대고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앓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연약함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놀이터에서도 가끔 울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곤 했다. 그런 그녀는 내게 상처였다.

사춘기 시절에도 절대 나약해지지 않으리라 가슴에 가시를 품었지만,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면 참을 수 없이 화가 났고 분노가 치밀었다. 왜 나한테 약한 모습을 보여주어선 내 마음까지 약하게 하냐는 것이었다.


막상 자주 우는 여자의 눈물을 비켜갈 순 없었고 기어코 눈물에 무너지는 날이면 집으로 돌아와 술을 마셨다.

눈물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대략 짐작건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 문제였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경제적인 문제, 그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흐름 속에서 그녀는 답답함과 우울을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하나 있는 아들은 눈물을 닦아 주는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화를 내는 태도 앞에 기가 찼을 것이다.


깊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그녀를 자주 잃을 뻔했고, 나까지 이어 길을 잃을 뻔했다.  

엄마가 없는 서른의 삶이란 가정을 꾸리지 않고 사는 나에게 여전히 어딘가 허전하다.


엄마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오래 전 그녀가 흘렸던 눈물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민을, 그녀의 아픔을, 그녀의 상처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내가,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외면하고 지냈다.


차마 그녀의 눈물을 보고 자라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그녀와 먼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번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서글프도록 오랫동안 우는 장면 앞에 서 있었다면 쉽게 등을 돌릴 수 없다.


슬픈 목격이기도 하지만 그를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하고. 사랑하려고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는 장면을 목격한 자, 더 애착하게 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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