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부치는 글

서른부근의 어느멋진 날들

by 이용현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무엇이 남는 걸까.

꽃이 지고 난 다음엔 무엇이 피는 걸까.

사랑이 떠나간 후에는 무엇이 오는 걸까


제주도의 해안도로를 달리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스치고 가는 풍경 뒤에는 어떤 것이 또 기다리고 있을까.

스물여덟 겨울, 제주도에 왔을 때 직장인인 여자와 잠깐 말을 나눈 적이 있다.

인터넷을 하면서 우연히 말을 걸게 된 여자는 서른을 갓넘긴 상태에서 겨울의 한라산이 너무 보고싶어 훌쩍 떠나 왔다고 했다.


오직 일상에서 홀로 떠나온 그 용기며 당돌한 모습 때문인지 등산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여자는 멋있어 보였다.

서울 어디선가 일을 한다 했지만 통속명도 하지 않은 터라 긴 대화는 주고 받지 않았다.


그 후, 5년 가까이 되어 다시 떠나온 제주도에서 문득 나보다 누나였던 그 여자가 생각났다.

이른 아침부터 한라산 눈꽃을 보기 위해 사라진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제주도에서 그가 갑자기 생각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잊고 있던 사람이 장소를 통해 기억속에서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한 바였다.


아마도 내가 그를 떠올린 건 제주도에 왔기 때문이며 짧은 시간동안 나에게 남긴 기억이 그 어떤 것보다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떠나왔다는 용기. 한라산을 가보고 싶다는 마음. 꼭 눈꽃을 보고싶다는 염원. 등산복까지 입고 의지를 다진 결의 등이 내가 지닌 열정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준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가끔 만나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타인에게 어떤 것이든 기억을 남긴다.

그리고 지금 가까운 이들과 만남이 유지되는 건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기 때문이고 어떤 식으로든 느낌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살면서 사람에게 기억을 남기고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다는 것.


살아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의 뒤에는 기억이 남을 것이다. 나를 바라본, 나를 스쳐간 이들에게 하나의 느낌으로 남아서 서로가 사라질 때까지 한 번은 서로를 추억하기도 할 것이다. 좋은 인연은 그렇게 찰나의 순간에서 영원의 순간까지 지속된다.


내일, 다시 맞이하는 새로운 날에는 어떤 풍경과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그 후엔 또 무엇이 남게 될까.



피천득의 인연을 떠올리며 제주도의 첫 날 눈을 감는다.


살아가는 동안 인연은 매일 일어난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육감을 지녀야 한다.

사람과의 인연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인연으로 엮여 있다.

<피천득 인연 중>


글 사진 이용현

#감성에세이#인연#제주도#온더로드게스트하우스#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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