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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Jan 21. 2016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본 조용필

오늘은 노래를 통하여 본

조용필의 사랑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중에서




조용필을 우리는 노래의 왕, ‘가왕(歌王)’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처럼 남을 인정하거나 칭찬 잘 안 하는 풍토에서 이런 칭호를 받기는 정말 어려운 겁니다. 더구나  대중가요처럼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서는 더 그렇죠.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왕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최고의 경칭이자 존경이 담긴 표현인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 분야에서 최고 소리를 들으며, 현역일 때 제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모두 네 사람입니다.


바둑으로 모든 기전의 타이틀을 보유했던,   ‘바둑황제’ 조훈현,

우리나라에서 불모지인 피겨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피겨여왕’ 김연아,

허허벌판에서 세계 최고의 포항제철을 만든 ‘철강왕’ 박태준,

그리고 노래의 모든 장르를 소화하여 직접 작사 작곡도 하고 노래를 하는, '가왕' 조용필입니다.


조용필이 가왕인 이유는'돌아와요 부산항에'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수없는 히트곡과 탁월한 가창력, 계속되는 엄청난 인기, 후대의 영향력 입니다. 거기에 하나를 더 꼽는다면 64살의 나이에도 새 음반을 발표하는 끊임없는 자기 변신입니다.


조용필이 음반을 내는 것은 단순히 음반 하나를 추가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새로운 음반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장르의 노래로 새로운 음악세계를  열기 때문입니다.    


조용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8살 때부터 미군부대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가출까지 해 노래를 배우고 불렀습니다.


그러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하여 인기를 끌었지만, 8개월 뒤 가요계에 대마초 사건이 일어나자 예전 미군부대에서 대마초를 4대 핀 것이 문제가 되어  은퇴를 하게 됩니다.




조용필은 이제야 무명을 벗어나나 했더니,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은퇴를 강요당할 정도로 세찬 시련이 온 거죠.


조용필은 이 시련기에 어떻게 했을까요?


대다수 사람들이 여기서 무너지고 맙니다.

하지만 그는 실의에 빠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노래를 찾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는 오히려 음악에 더 깊이 빠져 듭니다.

 ‘한오백년’을 비롯한 우리 창에 빠져들게 되고 판소리를 접목한 창법을 개발하자,  그때까지 미성이었던 그의 목소리는 탁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위기를 통해, 조용필은 오히려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성숙해진 겁니다.


이때 조용필에게 닥친 시련을 넘어서지 못했다면,  오늘의 가왕은 없었을 겁니다.


 그날의 시련이 오늘의 조용필을 만든 것이죠.


그는 미친 듯이 노래에 빠지고 죽도록  연습을 하다, 마침내  밴드를 결성해 밤무대 공연을 하게 됩니다. 방송 출연이 막혔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더했으니 어찌 결과가 없을까요.


 조용필은 1979년 ‘창밖의 여자’로 화려하게 부활을 하게 됩니다.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조용필, ‘창밖의 여자’ 중에서     




조용필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음반의 100만 장 판매를 돌파했고, 이후 1천만 장의 음반 판매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2013년, 조용필은 18집 앨범 이후 10년 만의 침묵을 깨고  데뷔  45년,  64세의 나이로 19집 음반 <헬로 Hello>를 내서, 1년 전인  2012년 세계적 히트작인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을 누르고 1위에 올라  골든디스크상을 받았습니다.


조용필은 로큰롤, 트롯, 발라드, 퓨전, 동요, 민요 등 노래의 모든 장르를 소화하여 자기 스타일로 개발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조용필은 전성기 때 5년 동안 양대 지상파 방송국의 가수상을 독점하자,  “앞으로는 가수상을 더 이상 받지는 않겠다”는 수상 포기 선언까지 하게 됩니다. 다른 가수들을 배려한 것인 동시에, 싸워야 할 대상은 다른 가수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임을 선언한 겁니다.


조용필은 1982년  일본을 진출하여 노래에서 성공을 거둔 '한류의 원조'이면서 개방되기  전,  중국과 소련 등 공산권 국가에서도 공연을 하였습니다.


이뿐인가요?


조용필은 세계 뮤지션들의 선망의 무대인 미국 뉴욕 카네기 홀에서 처음으로 공연한 한국의 대중가수입니다.   

미국 카네기홀은 1891년에 개관했는데,  클래식 음악가를 제외하고 '비틀스', '롤링 스톤스', 머라이어 캐리 등 톱스타들이 공연했습니다. 한국 대중가수가 이 무대에 오른 것은 지금까지 조용필(1981), 패티김(1989), 인순이(1999·2010), 이선희(2011), 김범수(2012) 등  5명뿐입니다.

2005년 8월 23일,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조용필은 방송사와 함께 북한의 평양에서 조용필 콘서트를 열게 됩니다. 조용필 공연 당시  북한 같은 나라에서도 공연의 암표가 돌아 30달러(북한 평균 근로자 월급 2배) 이상에 팔리다 이 마저도 구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평양에서 한국 가수가 단독으로 공연한 것은 이미자와  조용필뿐이라고 합니다. 조용필은 광장이나 몇만 명이 들어가는 체육관을 원했지만,   이미자는 2,500석, 조용필은 7천 석의 자리를 가득 메웠죠. 북한 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준 것이죠.   


 조용필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하냐면 지금도 공연을 하면 4,5만명이 자리를 메우고 함께 노래를 하는 ‘떼창’을 합니다. 심지어 공연 중 비가 와도 빗속에서도 이 팬들은 끝까지 공연을 보며 조용필과 함께 노래를 합니다. 공연 날이면 사람들이 단시간에 몰리다 보니, 지하철 시간표까지 바꾸게 됩니다. 이것을 몇십 년 동안 계속하는 가수는 오직 조용필밖에 없습니다.  정말 대단한 겁니다.


조용필은 당시 엄청난 소녀팬들을 가졌는데, 그들은 조용필의 공연 때는 물론 조용필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다녔습니다.


 ‘오빠부대’라는 말이 바로 조용필 때문에 생긴 겁니다. 지금은 아줌마 부대가 되었지만, 조용필의 소녀팬들은 지금도 생겨납니다. 그래서  조용필은 지금도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이들의 추적과 감시라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거죠.     


그런 조용필의 사랑은 어떠할까요?


조용필은 두 번을 결혼했습니다.


조용필은 인기 절정인 1984년 첫 결혼을 합니다.


무명시절 밤무대에서 노래하다가 만난 3선 국회의원의 딸인 무용교사 박지숙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조용필 아버지가 반대했듯이 당시의 가수는 지금과는 하늘과 땅입니다.


 인기 가수를 제외하고는 '딴따라'라는 비하와 함께  무시당하기 쉬운 직업이었죠.  그래서 여자 집안에서도 반대가 심했고 심지어 대마초 사건을 벗어나려고 권력자의 딸을 유혹했다는 오해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의 봉선사라는 절에서 치러진 조용필의 결혼은, 면사포도 없이 아는 사람 몇 명과 기자들만 참석한 비밀결혼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신문에는 '조용필, 산사에서 비밀결혼식'이라는 제목으로 톱뉴스를 장식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때 조용필이 갑자기 비밀 결혼한 이유에 대해 신부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신부가 결단을 내렸다는 것과 이미숙과의 스캔들 때문이라는 말도 합니다. 축복받는 결혼이라면 공개해야 하고, 비밀 결혼이라면 굳이 기자들을 초청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거죠.


‘대마초 파동’으로, 이미  타의로 한번 가요계를 강제 은퇴한 경험이 있는 조용필에게 구설수는 엄청난 부담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한 인터뷰에서 조용필은 결혼한 이유에 대해 속내를 비칩니다.  


“기자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하지만 박지숙씨와의 결혼은 5년 만에 끝이 납니다.



결혼 다음날부터 프랑스 초청으로 해외 공연에 나선 조용필과 밀려드는 기자, 소녀팬들의 충격적인 항의 등이 겹친데다 그것을 혼자서 견뎌내기 어려운 나이, 그 외로움과 압박을 못 이긴 박지숙은 약을 먹고 자살시도까지 하게 됩니다.  


준비 없는 사랑이기 보다는 노래에 빠진 조용필은 아내까지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쩌다 집에 있어도 하루 종일 음악에만 몰두하는 조용필을 보고,  아내 박지숙은 조용필에게 소중한 건 아내인 자신이 아니라 음악이라고 생각하여 결혼생활 자체에 오히려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낀 겁니다.


박지숙씨는 "잦은 해외 공연 등 가수 활동으로 집을 자주 비우는 날이 많고 성격 차이로 자주 다퉈 더 이상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어 이혼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조용필과 박지숙


조용필은 첫 결혼의 상대방에게 가진 것을 모두 물려주고, 깨끗이 이혼합니다. 그는 일체의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인 겁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곁에 있을 때 그것을  행복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그녀(박지숙)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절절하였는지는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조용필이 말하는 '사랑의 아픔'은 노래에도 실려있습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조용필,  ‘바람의 노래’




꽃이 왜 지는 지 그 이유를 세월이 가면 알게 될까요? 조용필의 사랑과 후회가 묻어나는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혼자 남은 고독,  어느 날 문득 그녀가 남긴  사랑과  사랑의 그림자가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가버린 여인을 생각하게 하죠. 그 심정은 노래로 알게 합니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 조용필,  ‘그 겨울의 찻집’




곁에 있을 때는 모르고, 떠나고 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아는 건 인생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사랑에 대한 아쉬움을 담은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이러면서 그의 노래는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인기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하늘 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조용필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조용필의 아내가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여성팬들의 끝없는 부러움과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 되었던  박지숙-지금 그녀는 미국에서 카페를 한다는 말도 있고  수녀가 되었다는 이야기만 들릴 뿐,  다시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조용필은 이혼한 후 노래에만 몰두하다, 다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1994년 조용필은 미국 공연 중 사업을 하던 안진현씨를  만나게 됩니다. 탤런트 김보연씨가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고 하죠.


조용필은  안진현 씨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되었고,  얼마 후 사람들이 묻자 "바로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여자"라고 밝힙니다.


그녀와 결혼한 이유에 대해선 조용필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그녀와 결혼한 건 미국에 살고 큰 사업을 하는 위치임에도 한국에 사는 여자들보다 더 가정적이고 순종적인 모습 때문이다."


안진현 씨는 딸 집안의 맏딸로서 여동생 안진영의 남편이 미 연방 의원 김창준입니다. 그녀의 집안도 좋았고, 크게 사업을 해서 재산이 1조 원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8개월 연애 끝에, 1994년 3월 25일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합니다.  이때  조용필 나이 45세입니다. 동갑인 두 사람이 다시 아이를 낳기는 좀 늦은 나이지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용필은  오직 두 사람만의 결혼생활을 위하여, 또 서로에게 충실하기 위해 자식을 갖지 않습니다.

두 사람 다 결혼생활을 한 번 실패한 재혼이었기에 서로 더 노력했고, 세월은 사랑까지  성숙시켰기 때문이죠.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십 년도 안 되는 2003년 1월,  아내 안진현이 심장병으로 구급차에 실려 가던 중 사망합니다.  아내가 조용필에게 남겨준 재산은 400만 달러,  당시  48억 원을 조용필은 전액 심장병을 고치는데 기부를 합니다.


심장병으로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담은 것이죠.


아내를 고향의 선산에 묻은 날, 조용필은 가까운 가족과 노래방에서 두 시간이 넘게 혼자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잘하는 건  노래밖에 없으니 그녀를 보내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과 외로움, 그녀가 가는 쓸쓸한 길을  조용필은 모두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진혼(鎭魂)도, 아픔도, 고독도 모두 노래로 표현한 거죠.  사랑과 이별을 그는 조용필답게 승화시킨 겁니다.


하루를 노래 연습으로 시작해서 노래로 끝나는 그가,  아내를 잃은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조용필은  3년 동안 노래를 부르지도 못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조용필은 자신의 사랑을 담아, 아내 안진현의 추모곡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가수 조용필이 데뷔 35주년 기념 공연에서 부를 예정이었던, 아내에 대한 추모곡은 끝내 만들지 못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슬퍼서 도저히 곡을 만들 수가 없다.”


조용필은 곡을 만들기 위해, 자신은 물론 아내와도 가깝게 지냈던 탤런트 김수미에게 직접 작사까지 부탁해 노래를 받아놓았습니다.


하지만 가사를 접한 조용필이 "너무 슬프게 만들었다”며,   "이 가사로는 도저히 곡을 못 만들겠다”며 괴로워했습니다.


추모곡의 제목은 ‘아마  오래갈 거야’였습니다.

노래 가사는 "온 천지 마다하고 그까짓 거 사랑하다가 가버린 사람. 친구야 그 사람 나쁜 사람이야"로 시작합니다.


"봄날의 무너진 축대처럼 해놓고 그렇게 간 사람.  불과 몇 달 전 새로 산 구두가 너무 이쁘다던데 신어나 봤습니까"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은 "당신 애인 들꽃 보면 발걸음 멈추잖아요. 곧 큰 무대에서 신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평화롭게 할 것 같아요. 신은 너무 깍쟁이라 두 가지 복은 주시지 않나 봅니다"입니다.


조용필과  아내 안진현


김수미는 부인과의 추억이 서린  "봄날의 무너진 축대처럼",  "새로 산 구두가 너무 이쁘다던데 신어나 봤습니까" 등의 구절이 가슴을 아프게 해 조용필 씨가 괴로워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필의 아내 추모곡은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조용필의 마음은 그가 만든 노래에 이미 담겨 있습니다.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연약한 이 여인을 누구에게 말할까요


사랑의 촛불이여 여인의 눈물이여

너마저 꺼진다면 꺼진다면 꺼진다면

 

바람아 멈추어라 촛불을 지켜다오

바람아 멈추어라 촛불을 지켜다오

연약한 이 여인을 누가 누가 누가 지키랴     


                      -조용필 작사 작곡,  ‘촛불’



심장병에 걸린 아내의 소생을 간절히 바랬지만 그녀는, 바람처럼 와서 운명처럼  또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조용필이 부른 노래 슬픈 사랑이라는 뜻의 ‘비련’처럼,  그 자신이 비련의 주인공이  된 거죠.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떨리는 그대를 안고

포옹하는

가슴과 가슴이 전하는 사랑의 손길

돌고 도는 계절에 바람 속에서

이별하는 시련에 돌을 던지네

아〜눈물은 두 뺨에 흐르고

그대의 입술을 깨무네          

          

                        -조용필,  ‘비련’



뒤늦게 찾아온 조용필의 불같은 사랑은  불같이 피었다가 사그라들었습니다.


고통과 고독은 어쩌면 예술가의 숙명일 지도 모릅니다.


그 고독과 고통을 통해 예술가는 영혼을 씻어 작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인생과 고독이 묻어나는 그의  노래, ‘고독한 런너’는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삶이 혼자 가는 길이듯,  인생은 누구나 고독하게 달리는 런너라는 뜻을 담았기에 더 그렇습니다.     



어느 하늘에 꿈이 있을까

어느 바다에 사랑 있을까

꿈을 찾아 사랑 찾아 뛰어 가네

.........

서로 사랑한 친구가 있었네

내가 사랑한 님도 있었네

이제는 모두 떠나버리고 홀로 남아


시작이라는 신호도 없고

마지막이란 표시도 없이

인생이란 고독한 길을 뛰어가네

.........

지쳐 쓰러져도 달려가리라

푸른 바다에 파도가 되어

우리 인생이란 머나먼 길에

나는 고독한 런너가 되어  


                    -조용필,  ‘고독한 런너’     



힘들게 만난 사랑을 보낸 후 그 뒤에 찾아온 적막과 쓸쓸함-  

사랑이 무엇이고, 인생은 또 무엇인가.  그  현실과 고뇌가 조용필에게  찾아왔을 겁니다.  그녀와 내가 보낸 시간, 내가 부른 노래를 생각하며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또 나에게 과연 어떤 빛깔을 하고 있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말이죠.



바람소리처럼

멀리 사라져갈 인생길


우린 무슨 사랑 어떤  사랑했나

텅 빈 가슴속에

가득 채울 것을 찾아서

우린 정처 없이 떠나가고 있네


여기 길 떠나는

저기 방황하는 사람아

우린 모두 같이 떠나가고 있구나


끝없이 시작된 방랑 속에서

어제도 오늘도

나는 울었네


어제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조용필, '어제 오늘, 그리고'




불가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저잣거리에서 해탈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랑과 미움, 안타까움, 아쉬움, 그리움 등 오욕칠정이 바람이 나무를 흔들듯, 끊임없이 사람을 흔들기 때문이죠.  


조용필이 사랑하는 아내를 보낸 마음이 가장 드러난 노래, 떠난 아내의 영혼을 추모하고  진혼하는 노래를 저는 ‘바람이 전하는 말’로 생각합니다.


이 노래의 가사만큼 조용필의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드러난 가사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바람이 전하는 말'을 조용필의 ‘아내를 위한 추모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 인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 봐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고독한 순간들을 그렇게들 살다 갔느니


착한 당신 외로워도 바람소리라 생각하지 마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 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그 꽃잎이 지고 나면 낙엽의 연기

 타 버린 그 재속에 숨어있는 불씨의 추억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조용필, ‘바람이 전하는 말’  




바람은 조용히, 보이지 않게 지나갑니다.

그래서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기는 정말 어렵죠.    


바람은 세월도, 사람도, 인연도, 사랑도 모두 가져 갑니다.


어느 봄날, 천지에 날리는 꽃잎은  이 세상에 살다 간 사람들이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말하는  가슴 아픈 그리움의 흔적일 지도 모릅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건 바람 소리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전하는 그들의 애절함을 담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바람이 부네요.

누군가의 애절한 마음을 담고서-.     






추신:



양인자가 작사한 조용필의 ‘바람이 전하는 말’은,  

시인 마종기의 ‘바람의 말’과 비슷하다고 하여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 가사를 시인이 문제 삼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에서 노랫말이 어떤 영감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저는 시도 노래도 다 좋아하기에 굳이 본문에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에서 나오는 구절에 영감을 받아 김환기 화백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을 그렸거든요.                                                                                                                                                                          

문학과 미술, 음악은 서로 장르가 다른 겁니다.  미술에서도 용인된다면,   음악에서도 용인이 가능한 것  아닐까요?                                                                                                                                                                                                                                      

시 하나가 영감을 주어 좋은 노래를 하나 더 갖게 되었으면 우리는 행복한 거 아닐까요?

 

시 하나로, 노래 하나로 세상이  따뜻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인과 가수는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이죠.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정호승 시인의 '풍경 달다' 중에서


  

세월이 가도 남는 것은 결국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의 노래가 나오도록 영감을  준 마종기 시인의 시입니다. .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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