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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Aug 17. 2016

"나는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민갑완

민갑완(閔甲完), 이 여인의 이름을 아십니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름입니다.


이 귀하고 소중한 이름이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잊혀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1887년 10월 12일,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합니다.

황제가 다스리는 독립국가가 된 겁니다.  


조선의 고종은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인 광무제(光武帝)가 됩니다.

광무제(고종)는 1명의 황후와 7명의 빈을 두게 되는데, 명성황후는 4명의 황자와 1명의 황녀를 낳습니다. 하지만 순종을 제외하고는 4명의 자식들이 태어난 지 1년도 안되어 모두 죽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불행과 한말, 국운의 혼돈이 명성황후를 주술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광무제(고종)는 황후 이외에 가진 7명의 빈 가운데, 어려서  죽은 2명의 황자와 1명의 황녀를 제외하고는, 3명의 황자와 1명의 황녀가  있습니다.  귀빈 엄씨 소생의 영친왕, 귀인 이씨 소생의 완친왕, 귀인 장씨 소생의 의친왕, 귀인 양씨 소생의 황녀(덕혜옹주)가 있습니다.


공주가 없기에, 빈에서 태어난 소생인 덕혜옹주를 고종이 얼마나 아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1919년 김장한과 약혼한 덕혜옹주는 결국 강제 파혼되어 대마도주의 아들과 결혼하게 됩니다. 덕혜옹주의 비극은 여기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1900년 광무제(고종)는 두 황자(皇子)를 의친왕(義親王)과 영친왕(英親王)으로 책봉을 합니다.   

하지만 1910년 한일병탄으로 대한제국은 불과 13년 만에 사라져, 조선도 대한제국도 끝내 부활하지 못합니다. 나라가 멸망하면서 겪는 비극은 왕실이든 민중이든 똑같습니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광무제가 되고, 그의 아들  순종은 대한제국의 2대 황제 융황제가 됩니다.

순종은 영민했지만 어려서부터 허약한 데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들이 고종과 순종이 먹는 커피에 생아편을 넣어 치아를 모두 잃게 됩니다. 커피를 즐겼던 고종은 맛이 이상해 아편이 든 커피를 바로 뱉지만 순종은 고종 앞에서 뱉지를 못해 그렇게 된 겁니다.


그 영향으로 결국 순종은  자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의 형제들 중에서  황제 위를 계승할 태자를 찾게 됩니다. 왕재는 의친왕이 더 강했으나 그의 기개와 능력에 대한 순종의 질투와 친일파의 농간, 일제의 방해로 결국은 순종의 아우인 영친왕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됩니다.


황실은 황태자인 영친왕과 혼인할 신붓감으로 명성황후의 집안인 여흥 민씨 민갑완을 지명하고, 그녀의 집안에 약속의 징표로 '약혼지환'을 보냅니다.

대한의 황태자비 민갑완


그러나 조선의 부활을 일제가 그냥 둘까요?


그래서 11세의 영친왕을 유학이라는 명목 아래 볼모로  일본으로 데리고 갑니다. 고종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후견인으로 최고의 교육을 시킨다는 명분과, 힘이 없는 군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용인하게 됩니다. 이 공작은 일제의 조선의 정신 말살과 왕실 말살의 음모가 숨겨진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

일제는 영친왕을 볼모로 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일본 여자와 혼인시켜 조선왕실의 맥을 끊으려 합니다. 하지만 영친왕(이은 李垠)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여인, 민갑완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혼인을 약속한 여인이 있다"라고 왕실과 영친왕은 일본의 회유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일제의 파상적인 압박이  황태자비인 민갑완에게 가해집니다. 그녀의 아버지 민영돈과 집안을 압박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단호했습니다. 그러자 파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엄청난 재산과 작위 보장이라는 유혹까지 건넵니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민갑완은 이 나라의 황태자비다. 그건 결코 바뀌지 않는다."


약혼을 깨지 않고 민갑완 집안이 단호한 모습을 보이자, 이제 일제는 황실을 압박을 합니다. 그러자 힘이 없는 황실은 시달리다 못해 민갑완 집안에 약혼지환을 돌려달라고 하소연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약혼을 깨지 않자 일제의  압박은 갈수록 강도가 거세집니다.


민갑완의 아버지와 주변은 일제의 사찰로 섬처럼 변합니다. 황실도 영친왕도 믿을 수 없이 일제의 칼바람을 혼자 맞서야 했던 아버지는 결국 화병에 눕게 됩니다. 어느날 황실에서 보내왔다는 약을 먹고 그녀의 아버지는 갑자기 죽습니다. 이렇게 일제의 농간에 명문가였던 그녀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납니다.


시대의 칼바람 앞에 혼자 선 소녀 민갑완은 결국은 11년간 지켜오던 황태자비를 상징하는 약혼지환을 황실에 내주게 됩니다. 시대의 격랑과 자신 앞에 벌어지는 낭떠러지 앞에서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과  삶의 근거는 이렇게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민갑완


고종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고 여러 가지 행동을 하자 결국 일제는 이완용을 시켜 고종이 저녁 식사 후 먹는 식혜에 무색무취의 독약을 넣어 고종을 독살합니다.


"말 안 듣는 늙은 개를 편하게 보냈다."

고종의 죽음을 표현한 매국노 이완용의 말입니다.


식민지가 되었지만, 낭인 칼잡이를 시켜 국모(명성황후)를 암살하고 국왕은 독살하는 이런 사례가 역사에 있습니까?  일제의 간악함을 보여주는 것이죠.


민갑완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영친왕과의  혼례만을 기다리며 10년 동안 책을 벗 삼아 지냈으나, 민갑완으로부터 약혼지환을 빼앗은 일본은 영친왕을   일본 황실의 공주 마사코(李方子)와 정략결혼시키게 됩니다. 민갑완은 집안도 망하고  파혼까지 당하게 됩니다.


이방자는 원래 일본 천황인 히로히토와 결혼이 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설에는 그녀가 아이를 생산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나오자 영친왕과 결혼시켰다고 합니다.


영친왕과 마사코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사건이 결혼식의 발목을 잡습니다. 예식을 사흘 앞둔 1월 22일 고종황제가 승하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고종은 1907년의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이준·이상설·이범준 세 사람을 파견했다가 실패한 뒤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보위를 넘겼는데, 고종은 1919년 1월, 열강들이 개최한 파리 강화 회의에 또다시 밀사를 보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다가 그것이 일제에 발각된 겁니다.


궁지에 몰린 고종은 상해에 있던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뜻에 따라 은밀히 해외 망명을 추진했습니다. 영친왕 이은이 마사코와 결혼하게 되면 조선 왕실의 맥이 완전히 끊어질 것이라 판단하고 반격의 한 수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고종이 당초 강하게 반대했던 황태자 이은의 혼사를 선선하게 승낙한 것도 그 때문이었죠. 하지만 망국의 군주는 일제에 의해 독살되고, 일본은 고종의 죽음을 뇌일혈로 발표를 합니다.


일제는 조선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고종의 국장을 서두르는 한편 영친왕과 이방자의 혼사를 1년 뒤로 연기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널리 퍼지면서 조선 민중들의 분노가 들끓었고, 마침내 국장을 이틀 앞둔 3월 1일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폭발했던 것이죠.


1919년 고종의 억울한 죽음이 분노가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3.1 운동입니다.

                                                                      

1년 뒤, 1920년 4월 28일 이은과 이방자의 결혼식이 일본의 동경에서 치러졌지만, 이 혼사는 조선인들에게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정체성을 우롱하고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일종의 쇼로 인식되었으므로 국내외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당시 상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서는 이은을 ‘원수의 여자와 결혼한 금수(禽獸)이며 적자(賊子)’라고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심지어 결혼식 날에는 테러 시도까지 있었습니다. 서상한이라는 유학생이 이 결혼을 막으려 했고 폭탄테러를 계획했지만,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현장에 잠복하고 있던  일본 형사에게 검거되고 맙니다.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이 일본에서 치러진 지 3개월 후, 민갑완은 중국 상해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이제 의지할 곳도,  기다려야 할 약혼자도 없는 조선은 그녀에게 지옥이었을 겁니다.


민갑완은 모두가 부러워하던 황태자비에서 서민으로, 그리고 파혼자로 전락한 겁니다. 고종이 망명을 준비하고  의친왕이 구들장에  굴을 파서 망명하다가 일제에 의해 다시 잡혀 돌아온 것을 비교하면, 그녀가 조선을 탈출한 것은 일제하에서 황족 인사의  유일한 망명 성공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인 김규식의 후원으로 그녀는 상해 현지의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그녀가 신학문에 재미를 붙일 무렵, 일제는 그녀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커지고 일제가 비난받을까 봐 학교 당국을 협박해 민갑완의 등교를 막습니다. 독립의 구심점이 되거나 국제사회의 초점이 되는 게 두려웠던 겁니다.

                              

그녀는 일제의 지독한 공작으로  파혼에 이어 또다시 큰 절망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김규식 선생은 그녀에게 한학과 영문을 가르칩니다.


일제는 그동안 그녀에게 결혼을 할 것을 강요합니다. 갖가지 조건과 유혹을 붙여서 말이죠.

"이제 파혼당한 마당에 어떻게 하겠는가?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결혼한다면 결혼 축하금은 물론이고 집안 부흥에도 많은 도움을 주겠다. "


민갑완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결혼을 하는 순간, 편히 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조선왕실을 능멸한 대가요 조선의 자존심을 판 대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일제는 이를 통해 "황태자비는 남자를 밝히는 여자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고, 대한제국 황실은 이래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민갑완은 일제의 회유와 공작을 모두 물리칩니다.


평생 정절을 지킨 민갑완


그녀가 성인이 되자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민갑완은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 이라며 거절합니다.  독립운동에 투신할 경우 임시정부는 힘을 얻겠지만, 그걸 일제는 집요하게 파괴하려 할 것이고 영친왕은 물론 국내에 남아 명맥을 유지하던 집안까지 폭풍에 말리며 엄청난 희생자가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시대의 격랑을 안으로 삭이면서 독서와 뜨개질로 세월을 보냈고,  여러 번의 혼담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합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 그녀도  함께 귀국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기억하거나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녀의 희생과 아픔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어도 영친왕은 귀국을 하지 못합니다. 일제는 패망했지만, 미군정에서는 영친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독립국인 대한민국이 세워졌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의 귀국을 막았습니다. 미국 신문에 한국의 새 대통령으로 영친왕을 보도했기에 그를  정적으로 인식한 겁니다.


1961년 5.16이 일어나고 박정희 정부는 영친왕의 귀국을 주선합니다.

 

영친왕


"아, 바람조차 다르구나! 여기가 내 땅인가?"


1907년 일본으로 끌려가 53년 만에  귀국하는 영친왕에 대한 신문기사 제목입니다.


영친왕은 민갑완의 눈물과 희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사람을 보냅니다. 그러자 꽃다운 처녀에서 고국을 떠나 만주의 바람으로 흰머리가 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그저 (영친왕께서)  행복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제와서 만나면 무엇하느냐. 어릴 때는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도 없다"며 영친왕 이은과의 만남을 거절했습니다.


후손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망국의 한을 잊지 않기 위해 상해에 있을 때도 늘 어두운 옷을 입었으며,  나라와 영친왕에게 흠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이 드러나길 원치 않았는데, 죽을 때까지 영친왕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1년 간 황태자비로 살았던 민갑완은 평생 혼자의 몸으로 살다가, 시대의 어둠과 망국의 한을 혼자 짊어진 채  1968년 2월 19일  오전 71세로 ,  부산 초량동 자택에서 후두암으로 한많은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의 무덤은 부산의 천주교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있습니다.


조선왕실이 이어졌다면, 평생 정절을 지키고 조선의 존엄을 지켰던 황태자비 민갑완의 신원은 복원되었을 겁니다.


이제 그녀의 명예와 이름을 지켜줄 사람은 오직 국민밖에 없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 141번지.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李垠,1897~1970)과 부인 이방자(李方子,1901~1989)의 묘소입니다.  왕릉이 아니라서 '영원(英園)'으로 불리웁니다.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이곳입니다.

이제라도 민갑완의 묘소는 이곳으로 이장되어야 합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정절을 기리기 위해서도, 황태자비라는 신원을 복원하기 위해서도, 애절한 삶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민갑완, 그녀가 마지막 황태자비였기에 겪었던 그 고통과 한은 언제가 돼서야 해원될까요?





추신:


대문그림은 천경자 화백의 작품입니다.

황태자비께서 평생을 어둠과 그늘, 인내 속에서 고독하게 계셨기에 밝은 색이라도 보시라는 마음에서 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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