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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Feb 04. 2016

겨울의 새벽 강은 당신을 부른다

-정태춘의 '북한강에서',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강(江)은 산에서 흐르는 물과 작은 개울이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큰 강도 바다를 이루지 못하기에 강은 바다로 가는 길목일 수밖에 없습니다.


개울보다는 크지만 바다보다는 작은 운명, 강은 그래서 겸손합니다.


교통이 안 좋은 시절, 강은 마을과 나라를 나누는 경계선이 되었고, 떠나는 사람들의 이별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은 어느 무엇보다도 떠남과 경계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우리가 TV 드라마를 통해 잘 아는 ‘용의 눈물’의 원작인 ‘세종대왕', 그리고  '금삼의 피'를  쓴 역사소설가 박종화는 한국의 강에 대해  열네 개의 강을 꼽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한 가닥이 우줄거려 만 가닥으로 퍼지는 것은 산이요, 만 굽이가 휘돌아 한줄기가 되는 것은 물이다.

산골마다 흐르는 억만 줄기 감도는 물은 끊일 새 없이 천고의 시름을 싣고  열네 개 큰 강을 이루어 우렁차게 들레며 바다로 돌아가니,

첫째는 한강을 치고, 둘째는 임진이요, 셋째는 소양(昭陽)이요, 넷째는 예성(禮成)이요, 다섯째는 대진이요, 여섯째는 금강이요, 일곱째는 사호요, 여덟째는 섬진강이요, 아홉째는 낙동강, 열째는 영홍강, 열 한째는 대동강, 열 둘째는 청천강이다. 두만강이 열세째요, 압록이 열네째다.

띠 같이 흐르는 강물이 푸른 비단 끝같이 동해 서해로 소리쳐 돌아갈 때, 만고풍상을 겪어 우줄거리는 태산준령이 또한 그대로 범속할 리가 없다

                                                                 

                                                                                                          -박종화, 전야(前夜) 중에서



   

여기서 처음 들어 본 강 이름은 사호강일 겁니다. 사호강은 전남 담양에서 발원해 광주와 나주를 흐르는 영산강(榮山江)의 옛 이름입니다. 대진강(大鎭江)은 북한의 양강도를 흐르는 강입니다. 예성강은 황해도 개성을 흐르는 강이죠. 찬란한 고려시대를 만든 강입니다.


월탄 박종화는 우리나라 남북의 좋은 강은 다 직접 가보았을 겁니다. 그러니 이런 글을  쓸 수 있지요.


 


예성강 푸른 물에 물새가 울면

말하라 강물이여 여기 젊은 이 사람들

말하라 강물이여 너만은 알리라

겨레 위해 쓰러져간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   



대학시절, 시대의 어둠에 맞서서 선술집에서 불렀던 이 노래는 김원중의 ‘예성강’입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예전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두만강’과 ‘선구자’입니다.


'두만강'의 노래가 주는 정한-

'선구자'의 노래가 주는 개척과 자강-


사공은 말없이 노를 젓고 고국을 떠나 만주로 가는 한을 지닌 노래가 두만강이라면,   봄을 선구하는 두견처럼 앞서서 고난의 길을 걷던 사람들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 선구자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현실의 한과 내일의 희망을 개척하는 선구의 정신이 함께 내재해 있는 겁니다.   

 

삼국사기를 지은 문장가, 김부식을 질투하게 한 정지상의  시는 '송인送人' 입니다.

이 시가 바로  '강에서 하는 이별'에서 나왔습니다.    



임을 보내며 送人


                                          

                                                정지상(鄭知常)   



비 개인 긴 언덕에 풀빛 짙어지고                

雨歇長堤草色多

남포로 임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까                

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는데

別淚年年添綠波  




이런 이미지와 느낌을 현대적으로 노래로 표현한 것이 바로 ‘애증의 강’입니다.


사랑과 미움이 다 강에 있다는 거죠. 강은 억울합니다. 사랑도 미움도 다 사람들이 하면서 강은 왜 애꿎게 붙드나요.




어제는 바람 찬 강변을

나 홀로 걸었소

길 잃은 사슴처럼 저 강만 바라보았소


강 건너 저 끝에 있는 수많은 조약돌처럼

당신과 나 사이엔 사연도 참 많았소


사랑했던 날들보다 미워했던 날이 더 많아

우리가 다시 저 강을 건널 수만 있다면

후회 없이 후회 없이 사랑할 텐데


하지만 당신과 나는 만날 수가 없기에

당신이 그리워지면 저 강이 야속하다오


                                        -김재희, ‘애증의 강’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으며 삽니다. 그럴 때는 새벽 강에 나가 보세요. 겨울의 새벽 강은 겨울바다의 을씨년스러움과 황량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강 어딘가에서는 봄을 만드는 움직임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눈이 오거나 안개가 낀 새벽 강의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은 우리에게  '아, 내가 살아있구나' 이 느낌을 바로 실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겨울의 강가에서는 정태춘의 노래가 저절로 생각나죠.

                                                                                                                                                                                                                                                                                                                  



북한강에서

                               



                                         정태춘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내 안에 있는 안개, 내 밖에 있는 안개...

무엇이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지 나의 문제를 정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해도 얻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강과 강이 만나는 곳은 두 군데입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하입니다.


양수리는 우리말로 '두물머리'라고도 하죠.  

교하는 광해군 때 수도이전까지 생각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을 가기 어렵다면 어스름 새벽의  한강도 좋습니다.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노동자의 비애를 말하는 시라고 하지만, 사람은 모두 인생의 노동자일 뿐입니다.  인생을  슬픔에 젖어 사는 것 괴롭지만 슬픔없이 사는 것도 멋없는 일니다.


강가에 나와 쭈그려 앉아 담배 한 모금 피면서 흐르는 강물을 보며 나와 가족과 친구와 이 사회와 나라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깊어지는 강을 보며,  내면의 강속으로 깊어지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새로이 힘을 얻어 자기가 사는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죠. 비록 그 마을이 먹을 것이 없어도-


결국은 강가에 내다버린  슬픔만큼

희망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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