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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문 Oct 16. 2023

1. 아침마다

작가노트

'잠이 저축된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잠도 돈처럼 저축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동안 밤샘 작업이 가능한 것도 전에 비축해 둔 여분의 잠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사실 나에게 불가능한 일 몇 가지를 말해보라고 하면 그 첫 번째로 나는 밤샘 작업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의 설명이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내가 밤샘을 못했던 이유는 저축해 둔 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하루 8시간을 정상 수면 시간으로 본다. 그런데 나는 새벽 서너 시면 일어나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잠을 저축하기는커녕 잠을 마이너스 통장에서 대출해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그 마이너스 통장을 채우고 있다. ㅎ


결혼하고 나서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 새벽 시간뿐이었다. 아이들 깨지 않게 조용히 일어나서 맥심커피 한 잔 마시며 책을 보고 일기를 쓰고 하루를 계획하는 그 시간은 맥심커피보다 더 달콤하고 은밀하고 소중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잠과 바꾸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와서 나름 명문대학을 다니고 있었지만, 서울 아파트에 살고, 집이 유복한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20대를 지나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는데, 어떤 선택이 후회 없는 선택인지 결정하는 일은 몹시 어려웠다. 그렇다고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후회 없는 선택, 아쉬움 없는 선택은 있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모든 선택은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겠다고 결심하고, 자신과 남을 탓하지 않는 것이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가능하지도 않은 후회 없는 선택을 고민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했다. 실수를 하더라도 시도해 보고,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이 살아가는 건강한 방법임을 인생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깨달았다. 아무튼 그런 선택에 대한 두려움, 인생의 미래에 대한 불안, 부족한 자신감 극복하기 위해 나는 아침마다 서너 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을 때까지. 이런 시간은 결혼 후 새로운 국면의 힘든 일들, 예를 들어 남편과의 관계, 시댁과의 관계, 아이들 양육, 빠듯한 생활비, 그리고 자꾸 사라져 가는 자아를 찾는 일 등, 이런 일들을 헤쳐나갈 멘털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새벽 나 혼자 보내는 서너 시간은 하루 세끼 식사보다 절실했다.


지난 9월부터 아침마다 시작하는 또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제 성경 읽기와 기도는 짧아졌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없어졌다. 대신 요즘은 성경을 보면서 주어 서술어에 밑줄 치기를 하고 있다. 나의 글이 자꾸 길어져서 주어 서술어 일치가 안 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성경에도 그런 경우가 많아서 비문을 제대로 고쳐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보다 유익하다. 주어 서술어에 밑줄 치다 보니, 주어가 다른 식으로 표현된 것도 볼 수 있고, 주어가 생략된 것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A5 반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니 매일 가뿐하게 할 수 있다. 점차 종속절의 주어 서술어는 생략하고 주절의 주어 서술어 위주로 찾게 되면서 글의 흐름, 문단의 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9월부터 매일 아침 하는 일과 중에 또 하나는 ebs영어 공부이다. 대학원 박사 과정을 하려면, 그리고 12월 딸들과의 미국 서부 여행을 위해 서서히 영어의 감을 올려야겠다 싶었다. 서점에 가서 ebs영어 교재를 살펴보았다. 예전에는 설명과 잡다한 읽을거리가 많아 싫었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 교재는 혼자서 자습으로 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뉘앙스의 영어들을 다루고 있는 <진짜 미국 영어> 교재를 사 왔고, 방송은 듣지 않고 아침마다 성경 읽고 기도한 후 <진. 미. 영>을 공부한다. 좋은 교재이다. 강추.


그리고 한글 문서에 오늘의 할 일, 한 일을 정리한다. 노트북 바탕화면에 '작업노트'란 이름으로 정리된 문서이다. 대학원 석사과정 시작하면서 여기에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나간 것은 아래로 내려가고 오늘이 맨 위에 기록된다. 어제 못한 것은, 복사하거나, 잘라내기 하여 오늘 일에 다시 덧붙인다. 대학원 공부하고, 전시 준비하는 일은 챙겨야 할 일정이 많다. 자칫 놓치면 졸업을 못할 수도, 전시를 못할 수도 있기에 매일 일정을 확인하는 것을 습관화해야 한다. 특히 건망증이 치매로 넘어갈 수 있는 이 나이에서는.  또한 이렇게 매일 작업노트를 기록하고 하루 중 중간중간 확인하는 일은 많은 일을 놓치지 않고 할 수 있게 해 준다. 간혹 3, 4일, 또는 1, 2주가 작업노트 기록 없이 훅 지나갈 때가 있다. 돌아보면 바쁘게 지냈지만 한 일이 별로 없다. 인생을 알차게 만들어 가는데, 아침마다 하는 이런 습관이 큰 도움이 된다. 내 인생의 절반은 아침마다 꾸준히 해온 이런 일들 덕분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런 나의 경험은 시간의 축적을 내용으로 한 '시간의 겹' 시리즈로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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