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는 일은 차의 맛과 향을 음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차를 맛있게 마시려면 차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듯, 각각의 차의 성질을 알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 차의 가장 좋은 맛과 향을 우려내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지차知茶, 차를 알아가기'라고 붙였다. 한자어에 '지음 知音'이란 말이 있다. <<열자>> <탕문편>에 백아와 종자기, 두 친구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거문고를 잘 타는 백아에게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다. 종자기는 백아의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백아의 마음을 다 헤아렸다고 한다. 그런 친구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제 세상에는 자신의 거문과 소리를 듣고 이해해 줄 사람이 없다며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이라 하고 '마음을 잘 이해하는 친구'를 '지음'이라 한다. 다도 역시, 차를 개별적으로 알아가는 '지차 知茶'의 과정이 있어야 차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겠다.
대한다업, 봉로녹차/입하
집에 녹차가 떨어진 지 오래였다. '녹차는 차다'라는 선입견과 예전에 맛본 쌩하고 떫은 녹차맛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하여 녹차를 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녹차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 시라도 내가 한 번 경험한 것으로 녹차를 너무 폄하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겼다. 그래서 녹차를 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중국차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녹차를 구매하기로 했다. 선입견이 고정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구입했다. 새로 산 녹차는 우리나라 대한다업에서 나온 '봉로녹차/입하'라는 차이다. 찾아보니, 오설록뿐 아니라 여러 업체에서 녹차를 생산 가공 판매하고 있었다. 검은 둥근 캔의 포장이 나쁘지 않다. 1957이라는 숫자를 보아하니 대한다업은 1957년부터 차를 만들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제로 '다채로운 봄의 향연'이라 붙어 있다. 상품명과 부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찻잎과 맛을 지닌 봄을 모은 차'라는 설명을 참고하여 짐작하건대, 입하(양력 어린이날 즈음) 전후로 수확한 차 잎인 듯하다. 물에 젖어 펼쳐진 잎을 보아하니 뾰족한 움(창)은 간혹 있고 주로 작은 잎들이다.
대한 다업, 봉로 녹차/입하
이렇게 '봉로녹차/입하'를 대략 파악했다. 이제 내가 차를 알아갈 차례이다. 차를 맛볼 준비를 한다. 둥근 다반에 개완(다관), 숙우, 찻잔, 다하, 차집게와 퇴수용 머그컵을 준비했다. 그리고 물을 끓였다. 물의 양은 보통 800cc~1000cc가량 준비한다. 전기 포트로 끓인 물은 드립 주전자와 집에 있는 텀블러(보온병)에 나눠 담았다. 드립 주전자에 담은 물을 먼저 사용하고, 텀블러에 담은 물은 나중에 사용한다.
뜨거운 물을 나눠 담은 드립 주전자와 텀블러
물의 적정한 온도는 차마다 차이가 있는데, 대개 녹차는 70~80도 정도, 백차는 80도 정도, 우롱차는 90도 정도, 홍차, 보이차는 100도 정도로 추천한다. 발효가 많이 진행된 차일수록 물의 온도를 뜨겁게 준비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나 계절에 따라 물의 식는 속도가 다르고, 물의 온도에 따라, 차를 우리는 시간에 따라, 또는 다기의 열전도율에 따라 차의 맛과 향이 달라지므로, 각각의 상황에서 차를 직접 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차와 사귐을 갖는 중요한 시간으로 여겨져, '지차 知茶'라는 이름을 붙여 봤다.
유리 다관에서 우린 봉로 녹차/ 입하
차를 우리기 전 다하(접시)에 두 스푼(3g 정도) 덜고 찻잎의 색을 보고, 향을 맡아본다. 살짝 익은 차 잎의 구수한 향이 난다. 아마도 덖은차인 것 같다. 뜨거운 물을 개완과, 숙우, 찻잔에 부어 다기를 예열한다. 예열에 사용한 물을 퇴수기에 붓고 개완에 찻잎을 넣는다. 녹차를 우릴 때는 70~80도 정도가 적당하므로 개완에 직접 물을 붓지 않고 숙우에 먼저 따라서 한번 살짝 식힌 후 그 물을 개완에 부었다. 녹차는 예민하다. 특히 온도 시간에 따라 많이 차이가 난다. 그러나 녹차는 숨김이 없다. 맛과 향을 빨리 내어 준다. 첫탕을 1분 정도 우려서 차 맛과 향을 보았다. 노란빛이 도는 맑은 연둣빛이 곱다. 깨끗하다. 녹차향이 풍성하고 구수한 현미 녹차의 향도 난다. 떫거나 쌩한 맛은 전혀 없다. 은은한 단맛이 있지만 살짝 부족하다. 시간이 짧았나 보다. 다시 개완에 물을 부어 좀 더 길게 우렸다. 이번에는 2분 정도 우렸다. 입 안에 감도는 단맛이 충분하다. 탕을 거듭할수록 향과 빛은 연해지나 단맛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차는 깨끗하였다. 4번 이상 우리니 더 이상 맛과 향이 나지 않는다. '봉로녹차/입하'는 맛과 향, 빛, 모두 선명하였다. 4~5점/5점 정도 주겠다. 최상품의 녹차를 마셔보지 못해서 감히 최상품이라 할 수 없지만, 흠잡을 데가 없었다.
찻잔에 담긴 봉로 녹차의 빛깔
엽저 관찰, 차를 다 우린 후 남은 잎을 관찰한다. 봉로 녹차의 귀여운 작은 찻잎들.
다음날 다시 마셔봤다. 전 날보다 물의 온도나 시간이 적절했는지 첫탕, 재탕, 삼탕 모두 완벽했다. 녹차향도 풍부하고, 현미가 없지만 현미녹차 같은 구수한 향이 나고 맛도 구수하고 단맛이 난다. 빛깔도 곱다. 녹차는 찬 기운이 있다 하지만, 역시 온몸을 기분 좋을 정도로 훈훈하게 해 준다. 땀구멍을 열어준다. 이상한 녹차를 맛보고 그동안 녹차를 오해했던 것에 미안하다. 차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아가다 보니, 이전보다 차를 여유 있게 즐기지 못한다. 지식을 얻다 보면 지식에 매이게 된다. 그러나 그 지식이 잘 숙성되면, 힘이 되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 그것을 네 가지 단계로 정리해 보았다. 이는 차뿐 아니라 모든 것을 알아가고 관계를 맺어가는 일에도 해당된다.
1. 책 한 권 읽고 세상을 다 이해한 듯 기쁜 단계. 이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긴 하나,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 이것에 만족하고 멈추면 큰 낭패를 당한다. 자신이 아는 지식이 전부가 아님을 늘 기억해야 한다.
2. 자세히 보는 단계.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지식이든 아름다움을 제대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 살피고, 이론과 실험을 반복하며 알아가는 구체적 경험이 쌓여야 한다.
3. 아는 것이 힘인 단계. 그렇게 쌓인 경험과 탄탄한 지식으로 자신감이 생긴다. 그러나 아직 지식에 매여있다.
4.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이 몸으로 체득되고, 내 안에서 숙성되어 지식에 급급한 데서 벗어나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단계이다.
지금은 차 한 잔으로 기뻐하던 시기를 지나 차를 살피고 알아가는 단계이다. 알아가는 것과 글을 쓰는 것에 급급해 차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있고, 차를 마시는 데 있어 평정한 마음이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러나 이렇게 차분히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이 지나면 좀 더 자유로이 차를 음미하게 되리라 믿는다. 다음 글에서는 '고산 생태, 백차'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