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취미와 마찬가지로 좀 더 고급스러운 다구를 장만하려고 하면 끝도 없다. 찻잔 하나가 백만 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좋은 다구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이고 그럴 여력이 있으면 상관없다. 그러나 자칫 재정난에 빠질 수도 있다. 화가 김환기는 물려받은 돈과 그림을 판 돈으로 달항아리 사 모으기를 즐겼다 한다. 그런데 6. 25 전쟁이 나자 대부분 버려두고 피난 가야 했고, 집에 있던 달항아리는 전쟁 통에 모두 깨져 버렸다. 그의 그림에 달항아리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다. 운치 있는 다방(차를 마실 수 있는 별실)을 마련하여 각양각색의 매력을 지닌 다기를 진열장에 두고 매일 쳐다보며 지내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편안히 차를 즐기고 가까이하는 것이 고급스러운 다기를 소장하는 것보다 우선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Tea Story는 일상의 차문화를 추구한다.
김환기 1958년작 '항아리' (50 ×60.6cm). [사진 제공 = 케이옥션]
가장 먼저 다관과 숙우를 장만해야 한다. 다관, 숙우를 구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용량이다. 1~3인용으로 다관은 150ml짜리가 적당하고, 숙우는 다관 용량보다 좀 더 큰 250ml 전후가 적당하다. 1~3인용으로 다관, 숙우, 찻잔 2~3개 정도 갖춘 세트 가격이 각각 따로 구매하는 가격보다 저렴하다. 주로 백자, 분청사기, 유리로 된 세트들이다. 제대로 차를 즐기려면 차에 따라 적합한 다기들이 있지만, 이 기본 세트로 녹차, 홍차, 우롱차, 보이차, 꽃차 등 마시지 못할 게 없다. 그러나 꽃차의 경우, 꽃이 물속에서 피어나고 꽃차 만의 아름다운 빛깔을 눈으로 즐기는 것도 중요한 경험인지라, 꽃차는 유리 다관을 추천한다. 이렇게 다관과 숙우를 준비한 후, 가끔 맘에 드는 찻잔을 하나씩 사 모으면 그 자체로 고급스러운 사치를 누릴 수 있다. 찻잔 또한 그 크기가 다양하다. 20cc 소배 찻잔부터, 120cc 대배 찻잔까지 그 용량이 다르니 유의하여 구입하면 된다. 다완茶碗은 '차 사발', '차 대접'의 뜻으로 말차를 마시는 큰 찻잔을 가리킨다. 사람에 따라서 또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다관, 숙우, 찻잔이 모두 한 가지 스타일로 구성된 올세트가 좋아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은 개인 취향을 따르면 된다. 두 가지 이상의 다기 세트가 있으면 기분에 따라 다양한 조합으로 이용해도 재밌다.
백자 3인 다기 세트, another table
분홍 장미 2인 다기 세트, 박 씨 상방
이조 다완
자료 화면은 이해를 돕기에 적절한 이미지들을 옮겨 온 것일 뿐 홍보와는 무관하다. 이러한 세트를 장만할 때는 숙우가 있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 간혹 다기 세트라고 하는데 숙우가 없는 구성이 있다. 백자 다관에 유리 숙우, 유리 다관에 백자 숙우의 매칭도 나름 재밌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관과 숙우는 한 세트로 찻잔은 다양한 것을 선호한다. 다양한 재질, 다양한 모양의 찻 잔을 구하여 차를 마셔보면 그 찻잔에 어울리는 차의 종류가 있고, 같은 차여도 찻잔에 따라 맛의 다름을 경험할 수 있다. 좋은 흙과 유약으로 알맞은 온도에서 구워낸 좋은 찻잔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차와 다기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계발해 나가면 취미 생활이 고급스러워진다.
다관과 숙우를 살펴보면 위 사진의 백자 세트는 손잡이가 긴 자루형이고, 아래 유리 세트는 손잡이가 고리형이다. 대개 자루형 아니면 고리형인데 취향 따라 고르면 된다. 그런데 다관의 경우 하나 더 살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찻물을 따를 때, 찻잎이 흘러나오지 않게 하는 거름 장치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관 안쪽 주둥이와 연결된 부분을 살펴봐야 한다. 거기가 통구멍으로 뚫려 있는지 같은 재질의 거름망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는 외관으로 보이지 않으니 뚜껑을 열고 확인해야 한다. 또 인터넷에서 구입할 때는 사진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제품 설명을 자세히 읽어 확인해야 한다. 통구멍으로 뚫려 있는 경우 차를 따를 때 차 잎을 거를 수 있는 거름망이 따로 필요하고 번거롭다.
다관 내부 사진, 주둥이부의 차 거름망 구조 연밥(연꽃 열매)으로 만든 차 거름망. 차를 숙우에 따를 때, 자루 달린 연밥 차거름망을 다완 주둥이 앞에 대고 따른다. 그 외에도 다양한 거름망이 있다.
차를 우리는 주전자를 칭하는 말로 다관茶罐, 차호, 티팟 tea pot 등 여러 용어가 있지만 본인의 글에서는 편의상 모두 다관이라 통일한다. 한편 유리 다관에는 다양한 거름망 구조가 있다. 다관 입구에 스테인리스나 유리 재질 또는 철망으로 된 거름망(필터)이 걸쳐져 있다. 또는 주둥이 안쪽에 몸체와 같은 재질로 거름망이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주둥이 안쪽에 나선형 철사가 걸쳐져 있는 것도 있다. 나선형 철사로 걸쳐 있는 것은 외관도 이쁘지 않고 뭔가 산만해 보여 추천하지 않는다. 다관 입구에 걸쳐 있는 철망이나 유리 거름망은 차를 우린 후 밖으로 들어낸 후 차를 따라야 해서 조금 번거롭다.
유리 다관에서 차 거름망 건져내기 한편 다관을 검색하다 보면 개완이라는 특별한 다기를 발견한다. 대개 도자기로 되어 있고 큰 찻잔 같아 보이는데 뚜껑이 있다. 찻잔처럼 잔 받침도 있다. 뚜껑 있는 찻잔이어서 개완盖椀이라 불린다. 그런데 개완은 차를 우리는 다관의 기능을 한다. 차 잎을 넣고 우려내는데, 뚜껑과 몸체 안쪽에 미세한 홈이 있어 그곳으로 차를 따른다. 또는 뚜껑을 살짝 비껴 열어 작은 틈으로 차를 따른다. 혼자서 차 마시기에 적당하다. 뭔가 특별해 보여서 장만해 보았다. 개완만 판매하기도 하고, 개완과 숙우, 찻잔을 한 세트로 판매하기도 한다. 개완만 구입하는 경우에는 숙우가 구비되어 있어야 편하다. 그러나 차를 우리는 도중 개완 몸체가 뜨거워져 손으로 잡기 어렵다. 게다가 차 잎이 쏟아지지 않도록 뚜껑을 조절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내가 구입한 것은 새의 주둥이 같이 작은 홈이 있어 뚜껑을 조절하지 않아도 되지만 몸체가 뜨거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요즘에는 개완의 몸체도 나무 조각을 붙여 손이 데지 않도록 배려한 것들이 출시된다.
토림도예 물결문 개완 개완을 이용해 우려낸 차를 숙우로 옮기는 모습 옹기 장터에서 구입한 매화문 개완과 찻잔, 1인용 양평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팥빙수 집에서 다양한 옹기, 도자기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거기서 발견한 1인용 개완세트였는데, 손에 들었을 때 느낌이 달랐다. 뭔가 묵직하고, 편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 차를 우려 마시면 차 맛이 좋다. 좋은 다기를 만나는 기쁨은 좋은 차를 만나는 기쁨에 못지않다.
다양한 모양과 빛깔의 찻잔
덧붙이는 글
'숙우'와 유사한 말로 '공도배'가 있다. '숙우熟盂'는 '익을 숙' '바리 우'로 '차를 숙성시키는 그릇'이란 의미를 를 갖고 있다. 녹차의 경우 한숨 식힌 물을 부어야 하는데, 숙우에서 한숨 식혀 다관에 붓는다. 또는 다관에서 우린 찻물을 숙우에 붓어 먹기 좋은 온도로 식힌다. 이런 의미로 숙우라는 이름이 붙은 듯하다. 한편, '공도배公道杯'는 '모든 잔의 농도를 일정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려낸 차를 공도배(숙우)에 모아 농도를 고르게 할 수도 있다. 다관에서 차를 우리면 윗물과 아랫물의 농도가 다르고 잘 섞이지 않는다. 이것을 공도배에 부으면 농도가 고르게 섞인다. 모든 찻잔에 고른 농도의 차를 분배할 수 있다고 하여 공도배란 명칭이 붙었나 보다. 녹차의 경우 숙우에서 한 김 식힌 물을 다관에 붓고, 잔에 따를 때는 순서로 농도를 조절한다. 1, 2, 3 순으로 잔의 반을 채우고 다시 3, 2, 1 순으로 나머지 잔을 채워 농도를 고르게 한다. 그러나 공도배를 이용해 농도를 고르게 하고, 마시기 좋은 온도로 한숨 식히는 것이 일상에선 편리하다. 간혹 '숙우'를 '수구'로 표기한 것도 있는데, '숙우'를 '물그릇'으로 오해한 명칭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