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낯선 곳에서의 달리기
#6.
낯선 곳에서의 달리기
-늘 달리던 익숙한 길에서의 달리기와 낯선 곳에서의 달리기는 어떤 느낌의 차이가 있을까-
나는 새로운 카페에 방문하는걸 상당히 즐겼다. 그 카페가 주는 그만의 풍취를 느끼고 싶었고, 색다른 분위기나 인테리어가 있다면 더 없는 감탄과 사진으로 감상을 남기는 편이었다.
카페를 유랑했던 이유는 커피를 잘 알아서라기보다, 익숙한 공간에서 탈피하고 픈 마음이 컸을지 모르겠다. 익숙함의 ‘긴장없음’이, 때론 나태와 무료함을 생산하다보니, 만화를 그리는데 있어서 센스있는 표현이 필요할때 적절한 ’깨어있음’을 공간에서 제공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깊은 깨달음은 사실, 고요함에 있다. 그곳에 머물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고요에 다다르기 직전 몰아치는 ‘무기’에 여지없이 항복했던 적이 많았다. 그 깨어있음을 위해 오랜 수행자들의 방식인, 방선이나 익숙한 나무 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방법으로 낯선 곳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지방이지만, 작은 도시의 공원 길은, 길이 잘 닦여 있어서 뛰기에 적합하다. 방해받을 만큼 동네 인원이 많지 않다보니, 뛰는 즐거움을 느끼기에도 충분하다. 그런 충분함을 가지고 있지만, 대회참가를 반복하는 것은 새로운 길을 달리며 얻게 되는 깨어있음 가운데, 가장 최고의 순수성을 제공 받는다고나 할까.
달리기 안에는 사실 모든 진리를 담고 있다. 그 진리는 어디서든 발현될 수 있고, 공간을 가리지 않지만, 대회에서 수많은 러너들의 각각 체화된 진리의 무게들 만큼, 한 공간에 밀집된 힘은 내 깨어있음의 게이지를 높여주고, 대세에 편승하여 쉽게 순항하듯, 그 기운에 영향(가피)을 받게 된다.
영향을 주고 받는 자리와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시간들은 내가 적절히 소화해 내야한다. 그래야 그 깨어있음을 충분히 발휘하고 대중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하면서, 같은 업을 지닌 생명체들의 집합이라 했다.
동업중생은 개별의 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공통된 공업을 지닌 중생들로 표현한다. 그 업으로 인해 달리는 사람들은 그 달리기라는 틀안에서 큰 영향을 주고 받는다.
동류의 기운을 느끼려면 내 달리기의 힘이 흐름에 얹어질 만큼의 지속력을 갖춰야 한다. 그게 아니면 갖춰진 만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내공만큼 느낀다는 말과 같겠다.
수행은 개별의 수행력과 더불어 공생하는 사람들의 영향만큼 퇴보나 진보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힘을 거스르기도 어렵고, 따르기도 어렵다.
불교에서 세계관을 이렇게 표현한다. 욕계, 색계, 무색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욕계라고 한다. 직관적으로 욕망의 세계라는 줄임말이다. 욕망을 이기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동업, 공업중생들은 욕망이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벗어나기 상당히 어렵다. 불교에서 이 욕계를 벗어나 색계, 무색계까지의 진보를 희망한다.
우리가 지구라는 별의 장력을 벗어나지 못해 공중에 뜨지 못하듯이, 우리는 이 욕계의 흐름을 거스리기 힘들다. 그렇기에 달리며 얻은 깨어있음이 큰 영향권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존재하기까지는 수없는 무기와 안정을 반복해야한다.
그저 오래 달려봤다고, 선수였다고 해서 그런 깨달음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 거대한 업의 장력을 벗어난 대자유인의 대열에 오르기가 달리기의 경험만으론 어렵다는 뜻이다.
산속에 묻혀사는 수행자들은 늘 한결같은 장소에 머물면서도 나날이 새롭다는 말을 한다. 계절의 변화와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의 풍광들이 무상을 설파한다고 한다. 그것은 새로움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상태일때라야 고정된 마음의 무료함을 깨어있게 하는 것이다.
늘 반복적이고 일정한 곳만을 달리는 나같은 수준의 수행자는 그 무료와 무기를 깨워 내려면, 공간과 시간을 달리하거나, 대회와 같은 이벤트를 만들어야만 환기를 시킬 수 있다. 자연은 늘 진리를 새롭게 보여주는데, 나는 낯선 곳에서 내 마음을 확인하고 있으니 참 비효율적인 러너인게 분명하다.
<책은 출시본이 아니며, 만든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