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나를 다루는 가장 조용한 루틴이다
2009년 가을, 회의실.
긴 사각 테이블 위로 커피 향 대신 싸늘한 공기가 떠돌았다. 누군가는 나를 힐끗 보더니 눈길을 돌렸고,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수첩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 그곳은 분명히 내 자리였지만 전혀 내 것이 아니었다.
‘낙-하-산’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그 단어는 공기 속에서 은밀히 흘러 다녔다. 처가의 입김으로 들어온 자리, 전공과도 무관한 업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 불편했지만 감히 불평불만을 입밖에 꺼낼 처지가 아니었다.
회사밖에서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집의 침묵, 차갑고 날 선 처가의 시선, 실패한 이력으로 잔뜩 움츠러든 내 모습.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내 안에서 바닥을 치고 있는 자존감이었다.
몸은 자리에 덩그러니 구겨져 있지만, 마음은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마치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처럼, 허공에 매달린 기분이었다. 온갖 상념들이 휘몰아치며 허공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의 나는, 분명 존재하되, 제 자리를 잃고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었다.
메모 – 내 감정을 붙잡는 방법
나는 어릴 적부터 메모광이신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아버지는 반듯하게 사각으로 자른 종이조각이나 수첩을 항상 곁에 두고, 정성스레 일의 진행 상황을 적고 줄을 그어가며 정리하시곤 했다. 그 영향이었을까? 나 역시 언제 어디서든 메모와 기록을 남기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숨이 막힐 때면 나는 수첩을 꺼내 들곤 했다. 그리고 낙서하듯 글자를 날려 적었다. 빼곡히 채워진 수첩의 글씨 속에는 어떤 날은 분노가, 어떤 날은 두려움이, 또 어떤 날은 자책이 담겨 있었다. 볼펜 끝이 종이를 파고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메모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호흡하게 하는 산소통이었다. 말로는 차마 꺼낼 수 없는 마음들이 글자로 옮겨지는 순간, 그들은 조금은 다른 얼굴로 내 앞에 다가왔다. 종이에 내려앉은 감정은 내 눈앞에서 ‘객관적 사건’으로 바뀌었고, 나는 비로소 한 발짝 물러서서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메모는 내 감정을 언어로 구조화하는 훈련 도구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내 안의 복잡한 기질들이 메모를 통해 조금씩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사주나 MBTI가 말하던 혼란스러운 조합이, 글자 하나하나를 옮길 때마다 정리되어 갔다. 감정은 물(水)처럼 흘렀고, 생각은 흙(土)처럼 쌓였다. 기록은 그 흐름을 길들이는 제방이 되어 주었다.
나만의 방식 찾기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그 답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었다. 내가 지금껏 해왔던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내가 잘하는 것. 그리고 그 실마리를 붙잡게 한 도구가 바로 메모와 기록이었다.
나는 점점 깨닫게 되었다. 내가 흔들리는 이유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 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할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주는 내가 태어난 시간 속의 기질을 비춰주는 거울이었고, MBTI는 세상을 해석하는 나의 시선을 보여주는 렌즈였다. 둘 다 정답은 아니었다. 다만 통찰로 이끄는 힌트였다. 그리고 메모는 그 깨달음을 현실 속에서 다루게 하는 가장 실전적인 기술이었다. 나는 수첩 위에서 나를 번역했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훈련해 나갔다.
기록의 힘
나의 사주에는 다섯 기운이 비교적 고르게 흐른다. 나무(木)는 생각의 싹을 틔우고, 흙(土)은 그것을 단단히 붙잡는다. 금(金)은 판단의 칼날을, 불(火)은 실행의 열기를, 물(水)은 사색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메모는 이 다섯 기운이 엇박 나지 않게 조율하는 지휘자였다.
MBTI 또한 마찬가지였다. 혼자일 때 분석에 몰입하는 INTP는 깊이를 주었지만 실행을 더디게 했다. 사람들 앞에서 이끌고자 하는 ENFJ는 추진력을 주었지만, 대신 쉽게 소진되게 했다. 메모는 그 두 성향을 잇는 다리였다. 생각에 잠긴 INTP의 손끝과, 사람들 앞에서 움직이는 ENFJ의 목소리를 종이 한 장이 연결해 주었다. 메모가 없을 때는 흔들렸지만, 기록을 통해 분석은 실행으로, 추진력은 성찰로 이어질 수 있었다.
회복의 시작
돌파구는 멀리 있지 않았다. 메모는 나의 숨구멍이었고, 동시에 나를 재건하는 기초 공사였다. 남들의 시선에 휘청거리던 나는, 내 기록 속에서 다시 중심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메모를 통해 하루의 파동을 측정했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쌓아 올렸다. 완전히 일어서지는 못해도, 최소한 쓰러지지 않을 힘을 얻었다.
그때부터 기록은 단순한 습관을 넘어, 내 기질을 훈련시키는 장이 되었다. 토(土)의 끈기, 수(水)의 순환, 화(火)의 열정, 금(金)의 절제, 목(木)의 성장 — 그 모든 성향이 메모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나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를 다루는 방법은 특별한 기술이 아니었다. 내 안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그 흔들림을 한 줄씩 기록하며 마주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메모는, 나를 다시 세우는 가장 조용한 루틴이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혹시 당신도 지금 누군가의 시선 앞에서 주눅 들어 있는가?
혹은 스스로의 실패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가?
그렇다면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어 보길 권한다.
메모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나를 다루는 첫 번째 훈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성향이나 기질이 무엇이든, 기록은 그것을 약점에서 강점으로 바꾸는 힘을 갖고 있다.
� 독자에게 건네는 질문
지금 당신을 가장 자주 흔드는 감정은 무엇인가요?
그 감정을 적어보면, 어떤 문장이 되나요(한 문장으로)?
다음 주에 실천할 아주 작은 행동 하나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