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갈밭이었다
뉴욕의 거리 난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양파와 고기를 구워내는 노릿한 냄새는 코를 유혹하고, 거리 공연자들은 트럼펫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며 흥을 돋우었다. 자판대 위에 놓인 형형색색의 옷과 액세서리들은 햇빛 아래 반짝거렸다.
미식의 메카답게 전 세계 음식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자유분방한 뉴요커와 관광객들은 비닐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들고 무리를 지어 흥청댔다. 여기저기서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뒤엉키며 거리는 번잡하면서도 활기가 넘쳤다.
나는 무대뽀 스타일
그 복잡한 거리에서, 나는 작은 가죽 가방 좌판 앞에 서 있었다.
“Okay Okay, how much?”
“Special discount for you!”
짧은 단어 몇 개를 억지로 꿰 맞추고, 과장된 미소와 손짓발짓을 섞어 나의 세일즈 필살기를 완성했다. 길거리에서 눈을 마주친 순간, 상대가 고객이 될지 그냥 스쳐 갈지를 판단하고 재빨리 다음 행동에 돌입했다. 다른 건 영 잼병인데 용케도 요런 눈치 레벨은 좀 되는 편이었다.
가죽 동전지갑 하나라도 팔아 치우면 그 밀당은 성공이다. 그 과정은 나에게 스릴감 넘치는 게임 같았다. 나름 승률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덕분에 무대뽀 길거리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지 않았나 싶다.
돌이켜보면 미소가 새어 나오는 장면이지만, 그땐 꽤나 진지했다. 나는 늘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는, ‘밀어붙이면 된다’는 자세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꽃길인 줄 알고 달렸던 내 인생은 어느 순간 돌아보니 자갈밭이었고, 몇 발짝 더 가니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들이 안정기를 다져갈 40대 초중반, 나는 한마디로 폭망 했다. 그리고 그 파장은 내 사랑하는 가족까지 궁지로 몰아넣을 만큼 거셌다.
“그때의 나는 뭐든 밀어붙이면 된다 믿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밀어붙인 건 결국 내 인생 절벽이었던 셈이다.”
도구와 해석의 기억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나는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환경 탓만은 아니었다. 정작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강하고 무엇에 약한지도 몰랐다. 그저 무식하게 앞만 보고 달리는 법만 알았을 뿐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순간, 떠오른 건 어린 시절부터 붙잡아온 소소한 도구들이었다. 아침마다 꿈해몽책을 뒤적이던 기억, 책상 한편의 바이오리듬 곡선, 고등학교 시절 호기심에 들춰보던 토정비결, 혈액형과 별자리로 성격을 가늠하던 놀이들. 당시엔 장난 같은 취미였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를 해석하려는 오랜 시도였다.
어쩌면 그건 본능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의 질서를 확인하려 한다. 누군가는 종교에서, 누군가는 철학이나 예술에서, 또 어떤 이는 사주나 MBTI 같은 상징의 언어 속에서 자신을 찾아간다. 나 역시 그 오래된 본능의 연장선에 있었다.
사주와 오행, 그리고 MBTI
사주를 처음 접한 건 뉴욕 빌리지의 작은 가죽가방 가게에서였다. 삶의 방향이 모호하던 어느 여름, 그 도구는 내 혼란을 해석할 새로운 언어가 되어 다가왔다.
여름 방학동안 미국 여행을 왔다가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는 동향 후배가 불쑥 말했다.
“형님, 천기누설이라고 들어 봤습니까? 사주 한번 봐드릴까예?”
“뭐라? 그게 뭐꼬?”
처음엔 돌팔이 약장수 같아 웃어넘겼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술술 풀려 나오는 오행의 논리와 내 삶의 궤적은 묘하게 들어맞았다. 나는 점점 그 세계로 빠져들었다.
나의 사주는 겉으로 단단해 보이지만 속은 쉽게 흔들리는 내 기질을 그대로 비추었다. 타오르다 금세 식는 성질, 강한 추진력 뒤의 허약한 회복력 — 모두 내 삶의 패턴과 닮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 MBTI를 접했을 때도 비슷했다. 결과는 늘 INTP와 ENFJ 사이를 오갔다. 혼자 있을 땐 사색과 분석에 빠지는 INTP, 사람들 앞에서는 이끌고 싶어 하는 ENFJ. 두 얼굴 같지만 사실은 ‘흐르는 성격’이었다. 한쪽은 생각을 깊게 했고, 다른 한쪽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균형을 잃으면 결국 나를 소진시켰다.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 모습이, 이제야 조금씩 설명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단지 ‘두 얼굴’이 아니라, 내 안의 오행들이 균형을 잡아가려는 과정이었다. 때론 불(火)의 추진력으로 달리다가, 때론 토(土)의 고집으로 버티며, 물(水)처럼 흘러가려 애썼다. 그 상반된 성향들이 충돌하면서도 결국 나를 단단하게 빚어갔다.
나를 읽는다는 것
사주든 MBTI든 답안지는 아니었다. 그저 나를 해석하는 언어일 뿐이었다.
토(土)가 강한 사주는 내가 안정과 구조를 갈망하면서도 작은 변화에 크게 흔들렸음을 보여주었고,
INTP 성향은 ‘생각은 앞서지만 실행은 더디다’는 내 패턴을 드러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를 읽는다는 것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훈련하는 일이다.”
도구는 내 본질을 결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반복된 해석의 과정이 나를 단련시켰다. 무너졌던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나를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읽으면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혹시 지금, 당신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왜 자꾸 흔들리는가?”라고.
그렇다면 주변에 있는 다양한 도구들을 찾아보자.
차분하게 스스로를 읽는 훈련을 시작할 용기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 독자에게 건네는 질문
당신은 지금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기질이 당신을 지탱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발목을 잡지는 않습니까?
지금까지 외면해 온 당신의 기질과 약점을 들여다볼 용기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