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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으로 김재식 Aug 18. 2018

평범하지만 가장 귀한 선물 - ’일상‘

사는 날과 함께 동행한 말씀 

특별하지 않은 날을 그리워하면서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켈러


죽음을 선고받고 절벽에 선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고통과 눈물로 투병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첫 번째 소원은 무엇일까요?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 이란 제목의 글에서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라"


‘내일 기약이 없어 살림을 넘기는 엄마’


아내가 국립암센터에서 입원과 치료를 받을 때입니다. 같은 병실에 지내던 그 분은 폐암말기였습니다. 어느 날 그 분은 집의 그릇을 다 정리하며 딸에게 살림을 인수인계시켰습니다. 그걸 인수받으며 슬프고 괴로워하던 딸의 이야기도 포함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언제 갈 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미리 정리해야지요. 그리고 남편에게도 말했어요. 나 떠나면 부탁인데 1년만 지나서 재혼해달라고. 내 맘이 서럽고 화나서요. 사실 알지도 못할 텐데도...”


그랬습니다. 죽음과 싸우는 암 환자들은 ‘내일’이 올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내일이 온다고 맘 편히 사는 이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좀 덜한 환자들의 투병 목표도, 소원도 기껏 그들이 아프기 전 그렇게도 힘들다며 불평하고 안달하던 그 이전의 일터로, 그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참 단순한데 무지 어려운 소원...


불량하지만 자유를 누리는 딸


‘그저 살아서 곁에만 있어도 고마운 사람들’


“야! 딸, 그렇게 돌아다닐 거야?”

“뭐가 어때서?”

“그래도 숙녀가 그거는 아니지...”


학교 기숙사 주말 퇴소하는 날 딸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아이가 빨간 츄리닝 바지에 양말도 안 신은 채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나왔습니다.


“날더러 60살 전에는 시집도 안 보낸다며? 그럼 뭔 상관있어!”

“그건 그거고...”


아내는 지금 딸 아이 나이인 22살에 나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 생활 20년 되던 해 주부와 엄마와 아내 자리를 파업해버렸습니다. 희귀난치병 발병에 이어 7개월 만에 전신이 나무토막같이 꼼짝 못하는 사지마비로. 그 바람에 초등학교 5학년이던 막내 딸아이는 졸지에 고아처럼 시골 외가댁 컨테이너에서 혼자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5년을 혼자 살아내더니 고1 학기 마친 후 어느 날 성적표 한 장을 내게 내밀었습니다. 가방에 처박아놓고 굴러다니다 너덜해진 종이성적표, 거기 적힌 숫자는 때 묻고 너덜해진 종이와는 다르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1학년 전체 400명중에 10등 안으로 들어간 성적표. 대견한 딸이 고맙고 한편 기쁨과 동시에 목이 메고 눈이 뜨거워지는 묘한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 남들 눈치 못 채도록 감추느라 혼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또 하나의 못 잊을 경험’


이 악물고 투병한 지 5년쯤 되던 어느 날 아내가 병실 침상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얀 시트가 머리까지 올라간 채 체온의 흔적도 없이 써늘한 빈자리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난 이제 못살아...”


병실 유리창 밖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도록 밥도 굶고 침묵으로 있다가 지는 노을을 보았습니다. 그때 외로움에 복받쳐 울었던가? 그런데... 손을 뻗으니 아내가 잡혔습니다. 다행히 꿈이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내게 가장 소중할 선물은 딸의 상위 5% 성적표도, 죽은 나무토막에서 산 토끼처럼 뛰어다닐 아내의 건강회복 그런 기적도 아니라는 것을. 정말 큰 선물은 아픈 채로라도 살아 있는 딸과 아내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이 곁에 있는 오늘, 지금 여기이고요.


‘특별하지 않은 날을 그리워하면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삶은 특별한 시간들보다 평범한 시간들이 더 많습니다. 은행에서 순서표를 뽑아 기다리고, 식당에서 음식 나오길 또 기다리고, 지하철에서 시간을 보내고, 친구에게서 연락이 오면 문자를 보내고, 결국, 이 평범한 시간들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폐암 말기 엄마는 딸에게 살림을 넘기며 ‘평생 보고 또 본 가족을 며칠만, 아니 하루라도 더 보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중증난치병 걸린 아내를 둔 저는 그저 아픈 채로라도 곁에 있어달라고 빕니다. 성경은 그래서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범사에는 흐린 날과 맑은 날, 슬픈 날과 기쁜 날, 행복할 때와 고통스러운 날 모두가 포함되는 거지요. 큰 일 작은 일에 구분 없이 계속 감사하라는 말이지요. 이 성구를 읽으면 떠오르는 찬양가사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시간에도 모두를 감사로 받는 마음이 참 좋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 ...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외로운 가을 날 감사/ ...응답하신 기도 감사/거절하신 것 감사/ ...아픔과 기쁨도 감사/절망 중 위로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하늘 평안을 감사/내일의 희망을 감사/영원토록 감사해”


가끔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단순히 그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나도록 감사함을 느낍니다.때로는 불평을 하다가 그리고 누군가 나와 같지 않다하여 분함을 이기지 못해 씩씩 거리다가 이런 속 좁은 잣대로 세상을, 사람들을 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속죄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주 그걸 알았지요. 그래서 자주 울었지요. 그 횟수만큼 분명 행복하고 평안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의 성자 소리를 듣게 되었지요. 일상은 그런 기적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전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큰 선물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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