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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으로 김재식 Aug 19. 2018

겨울, 그리고 '춘화현상'

사는 날과 함께 동행한 말씀

“여보! 빨리 와서 같이 먹자!”

“먼저 먹어, 이거 마져 다듬어서 갈께!”

“그럴까? 애들아! 먹자~”


어머니에 조카들까지 8명이나 되는 식구가 왁작지끌.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으면서 시골마당에서 나무 숯불을 피우고 걸친 석쇠에 온갖 것을 구워 먹었습니다. 삼겹살, 칼집 낸 생닭, 추수해서 보관한 콩, 마늘쫑 등등. 그렇게 그 해 겨울은 참 요란했습니다.




- ‘눈치도 없는, 평생 남의 편인 남편이 되어’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어느 겨울 아침 새벽같이 먼 병원으로 가서 피검사를 하고 내려오는 고속도로 길. 곁 조수석에 시트를 넘기고 비스듬히 누운 채 실려 오는 아내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당신은 결혼생활 중 언제가 행복했었어?”

“... 난 사람들이 두려웠어, 그래서 행복하기 힘들었던 같아”


물어 본 내가 면목이 없었습니다. 명색이 20년이나 같이 산 남편인데 아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가슴을 졸이며 행복하게 못 지내는 걸 눈치도 못 채다니... 시골마당의 고기파티를 하던 그 겨울과 또 다른 해 겨울은 몸도 고단하고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미안해, 혹시 다시 태어나면, 넉넉하고 스트레스 안주는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아.”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 이렇게 아파보니 사는 게 겁나”


병으로 무너지는 아내의 몸은 손에 쥔 것을 다 놓게 했습니다. 적금도 직장도 집도 날리고 마침내는 아이들조차 뿔뿔이 살게 했으니 심정이 편치 않았습니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뭘, 우리 사이에! 흐흐”


목욕과 식사는 물론이고 소변과 기저귀까지 내게 맡긴 아내. 졸지에 갓난아기가 되었고 나는 24시간 겨우 두 살 정도 수준의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어미가 되어 갔습니다. 병원에 돌아와 보내는 긴 겨울, 걸핏하면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 꾸역 목을 넘어가곤 했습니다. 계절의 겨울은 한 해에 한 번 오지만 인생의 겨울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온다는 걸 내게 가르치며...



 

- ‘춘화현상 [春化現象]’ - 그래도 추운 겨울이 꽃을 진하게 한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을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하는데,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이런 현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농사도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수확이 훨씬 더 많다고도 합니다. 사람의 생도 춘화현상을 닮았습니다. 고난을 견디고 이겨낸 사람들에게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성품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련의 과정을 거친 인생은 마치 가을보리와 같이, 이전보다 더욱 나와 남에게도 유익함을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언젠가 딸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습니다. 멀리 있는 대학에 입학하고 기숙사로 들어간 딸이 안쓰러워 거의 일 년을 날마다 아침이면 보낸 문자 편지글 중에 하나입니다.


“딸아, 만약에 신이 단 하나의 소원만 들어준다면 나는 이렇게 빌고 싶다.

살면서 겪을 두려움 실패 이별의 아픔 등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견뎌낼 희망을 달라고. 피하기만 해서는 사는 것이 얼마나 권태로울까 싶어서, 정말 행복해지려면 바라는 것과 기다림이 있어야하니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춘화현상이 그저 자연의 한 법칙을 넘어 의도적이고 약속에 기반한 신앙의 법칙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 야고보서 5:10-11]


- ‘꽃 향기 백리, 사람향기 만리! 나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시도 있고 노래도 있습니다. 정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꽃의 향기가 백리를 간다고 ’화향백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향기는 발 없고 바람 없어도 만리를 간다고 해서 ‘인향만리’라는 말을 낳았습니다.


아! 이렇게 만리나 가는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는 어떻게 하면 피어나는 걸까요? 존 밀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악취 가득한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그런 향기로운 사람들 곁에서 머물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팍팍한 메마른 세상을 살면서 외로움을 느낄 때면 그런 향기로운 사람들이 지극히 그립습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은 해뜨기 바로 직전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봄을 그리 좋아하며 기다리는 까닭은 겨울이 혹독하게 춥기 때문입니다. 만약 겨울이 춥지 않다면, 봄도 조금은 덜 반가울지도 모릅니다. 고난과 행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삶이 행복할까요? 심리학자 칼 융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정도 어둠이 있어야 행복도 존재한다. 행복에 상응하는 슬픔이 없다면, 행복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고난을 어떻게 대하는냐에 따라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무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는 참으로 맑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분이었지만, 일생을 질병의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그가 그 고통 속에서 견디며 오히려 꽃을 피운 ‘춘화현상’의 시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뵙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욥기 23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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