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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으로 김재식 Aug 21. 2018

착하게 살아도 왜 고난이 올까?

사는 날과 함께 동행한 말씀




<착하게 살아도 왜 불행이 올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시간을 보니 새벽 2시가 좀 넘었다. “왜 그래?” “침대 머리가 덜 내려가서 힘들어...” 아내의 몸에는 소변주머니가 대롱거리고 달려 있었고 그 소변주머니 호스의 끝에는 힘들게 반쯤 돌아누운 아내가 있었다. “진작 깨워서 말하지...” 나는 덜 내려주고 잠든 미안함은 말도 않고 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착해빠져서 고생을 사서 하네 미련하게...’


그런데 불편한 침대로 잠 설친 이유치곤 이해하기 어렵게 아내는 훌쩍이고 있었다. “왜 울어?” “5년 동안 혼자 군복무 마치고 돌아오는 둘째가 자꾸 생각나서...” 그 둘째아들 입대하는 날, 아내는 병이 너무 심한 상태였다. 아이는 혼자 가서 머리 깎고 혼자 짐 정리하고 훈련소를 걸어 들어갔다. 그게 언제인데 아직도 미안하다며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오는 아내. ‘착한 것도 죄일까?’ 문득 착한 심성, 착한 사람이 치르는 아픔들이 벌처럼 느껴졌다. 착한 것이 죄가 아니라면 이렇게 남을 괴롭힌 적 없는 아내가 여러 가지 미안하고 슬퍼서 눈물 흘릴 리가 없다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착해빠지기만 한 아내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망부석처럼 십년을 넘게 꼼짝 안하고 병실 침대를 지키며 산 아내를 가을 단풍 곱게 물든 산에도 데려가고, 맛있다는 음식점도 데려가서 먹이고 싶다.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하면서, 좋아서 못 견디면서 웃는 얼굴 보고 싶다. 맑은 하늘을 보며 형벌처럼 무겁게 땅에 묶은 장애인 몸뚱이도 잠시라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파란 바탕에 하얀 뭉게구름이 여유롭게 흘러가고 있고 아무데나 셔터를 열두 번만 누르면 달력 하나가 생길 것 같은 그런 멋진 하늘이 나타나는 날이면 문득 손 모으고 빌고 싶다.


나쁜 남자도 기도할 수 있다 - “소변 줄도 빼고, 눈에 안대도 빼고, 몇 시간쯤은 휠체어에 앉아 버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착하게만 산 그대 얼굴이, 마음이 이 좋은 날의 맑은 하늘처럼 환해지게 해주세요. 제발... 아멘”


‘착하게 살아도 왜 고통을 당할까? 착한 끝은 행복할까?’


욥은 착하게 살았는데 왜 그런 지독한 고난을 당했을까? 물론 사탄이 하나님께 허락을 받고 준 불행이라거나 나중에 더 잘된 결과 등을 제외하고 그가 고난의 진행 중에 겪은 고통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비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착하게 살던 이들이 지금 고난이 진행 중에 있다면 마찬가지일 거다. 나중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안다고 한들 지금 겪는 그 중한 고통이란 참기 힘겹다.


우리가 행복전도사 희망전도사라고 알던 작가 방송인 최윤희씨는 남편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 방송과 강연, 책을 통해 숱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가지라던 사람이 아이러니하게 본인이 생을 자살로 마감한 것이다. 최 씨가 남긴 유서에는 생전에 느낀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떠나는 글’이라는 유서에서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다”고 입을 연 뒤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수십 가지의 통증이 24시간 따라오는 루프스라는 자가면역질환이 평생 주장하며 살아 온 삶의 의욕보다 더 질겼던 것일까?




미국의 저명한 신학박사 스탠리 하우워어즈는 오랜 세월을 정신병 아내를 돌보았지만 끝내 이혼을 요구한 후 자살한 아내로 해피엔딩이 아닌 끝을 맞았다. 그에게 답 없는 길을 묵묵히 살아가야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삶이라는 아픈 고백을 낳게 했다.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하는 절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내게 이런 벌을 주는지’ 와, 가족들의 ‘왜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한 일 없는데 우리 가정에 이런 고통을 주는지’ 하소연을 보면 착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기쁨을 가져오고 행복한 결론을 주는 것은 아닌가보다.


'미치든지 아니면 웃으며 살든지...'


나는 십여 년이 넘어가는 병원생활을 하면서 온갖 사람들과 부대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은 약과고 투병에 지치고 비관적인 환자의 까닭 없는 시비나 간병에 찌들린 환자의 보호자들이 던져대는 싸움에도 견뎌야했다. 솟는 분노를 계속 삭이고 삭이다가 감당이 안 되면 폭발할 것을 알면서도 참았다. 안 그러면 당사자인 나도 다칠 것이고, 남들도 다칠 것이다. 그걸 보는 아내는 천성이 착해서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더 심하게 다친다. 그래서 나는 늘 참아야 했다. 그렇게 신앙인이고 착한 사람 흉내(?)를 내다가 결국 탈이 나서 정신과 치료와 약 복용을 3개월이나 했다.


그런데도 왜 살아야할까? - ‘죽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살 의무’만 남은 사람들


아침 드라마에서 나쁜 여자주인공이 저지른 모든 게 들통 나서 옥상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 착한 여자주인공이 말렸다. "넌 죽을 자격 없어! 살면서 죄 값아" 같이 보던 아내에게 내가 말했다. "당신도 죽을 자격 없어! 까먹은 돈이 얼마고, 시간 까먹고 맘 고생시킨 게 얼만데, 나아서 밥하고 빨래하고 다 갚아야지!" ‘죽을 자격’, 죽는데도 자격이 있어야 한다면 세상에는 못 죽을 사람이 태반일거다. 남에게, 가족에게, 자기 자신에게 못 다한 책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아는 것과 다르게 살아버린 세월들, 그 많은 잘못들을 따지면 죽을 자격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


그러고 보니 ‘죽을 자격’이 없는 우리는 모두 ‘살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 ‘살 의무’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가 아직 못 한 숙제, 남들에게 실수했던 행동, 마음 아프게 했던 말들, 아직 사과를 하지 못한 잘못들... 뭐 그런 거 아닐까?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지 못했던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도록 그 자녀를 꼭 안아주며 사랑해주는 생활, 그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 날 드디어 ‘죽을 자격’을 얻고, 그런 순서대로 죽는 것, 그게 하늘의 순리일 것이다.


미래의 뿌리는 과거다. 오늘은 다시 미래의 과거가 된다. 오늘 나의 사랑은 미래의 행복이 될 것이고, 오늘 나의 절망은 미래의 황량함이 될 것이다. 오늘 내가 보내는 순간들이 미래의 조각이 되어 어떤 그림을 만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천국이라는 미래를 그리는 화가들이고 조각가들인 셈이다.


성경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혹시 그런 삶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좀더 의무적으로 그렇게 살라고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부터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 시행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은 자신이나 제삼자가 위험에 빠지지 않는데도 고의로 구조하지 않는 구조불이행(Failure to Rescue)을 처벌하는 법규를 통칭한다. 구조거부죄 혹은 불구조죄라고도 부른다.


신약성서 중 누가 복음서 10장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유래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강도를 당해 쓰러진 유대인을 보고 당시 상류계급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으나 유대인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구한다. 세상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만들어가며 미래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바탕인 성경의 삶을 살아야할 신앙인에게는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더 나가 성경은 아예 착하게 살면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못을 박았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 베드로전서 3장17절] 세상 사람들이 다 지금, 자기의 욕망을 위해 그렇게 살 때 신앙인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것이 고난이다. 당하는 것 같아도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미련하게 보여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 이유는...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방식으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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