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감정의 휴지통’이 있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들어주세요.

by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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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억울한 일이 있는데요. 좀 들어주시렵니까?”


종종 억울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 속 상대방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거나, 떨고 있거나,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격앙된 목소리로 그야말로 말을 쏟아내는 이들의 하소연을 듣다 보면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이고 심장이 거칠게 뛴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하이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면 바로 다른 창구로 전화를 돌려 버리게 됐다.


그럼에도 매몰차게 전화를 돌리지 못할 때가 있는데,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내 얘기 좀 들어달라” 하소연하는 경우다. 딱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슨 사연인지 일단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 그러세요’ ‘네, 그렇죠’ ‘그러셨겠네요’라고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뿐.


30분이 넘어가면 ‘전화를 잘못 건 거 같은데’, ‘여기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아.. 괜히 받았다’는 마음에 통화 자체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상대방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 마디 던지면 ‘좌불안석’이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지고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준 사람이 없었어요.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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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20년 전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하면 집안은 살얼음판이 된다.


“그때 오 OO, 김 OO, 이 OO 씨 빚 누가 갚았는데?’

“당신 조카자식들까지 내가 다 키웠어!”

“그때 큰 애만 아니었으면 벌써 집을 나갔을 거라고!”


부모님은 돼지를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살림을 꾸렸는데 어느 날 돼지우리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임신한 돼지가 대부분이었는데 화재로 어미들이 놀라 새끼들은 유산됐고, 어미 돼지들도 폐사해야만 했다. 그 후 남은 돼지를 모두 정리하고 엄마는 동네 양계장에 계란을 주우러 다녔고, 아빠는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차비 1000원이 없어서 아침에 울고불고했던 적도 있다. 그때 우리 집이 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자랑할 수준은 못돼도 서울에 집도 있고 형편도 나아졌다. 하지만 엄마는 힘들고 막막했던 그 시절의 감정을 아직도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다른 가족들은 웃어넘기지만 엄마는 당시의 무게를 고스란히 꺼내놓으며 울분을 토해낸다. 그 상황에서 나의 역할은 재빨리 화제를 돌려 엄마를 당시의 감정과 분리시키는 일이다. 엄마가 본격적으로 감정을 쏟아내기 전에 내가 행동을 개시하기 때문에 아빠도 함께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 30분 동안 하소연을 들어준 것밖에 한 게 없는데 ‘마음이 풀렸다’고 말하는 그 사람과 엄마의 모습이 겹쳐진다. 엄마가 20년 전 그 고통을 아직도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때의 감정을 쏟아낼 휴지통 하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친구라도 있었으면 만나서 네 아빠 욕이라도 할 텐데”


무심코 던진 엄마의 한마디에 가슴이 저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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