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이 선택의 순간을 만나게 되면 각 선택지의 옵션들을 꼼꼼히 따지는 사고의 과정을 거쳐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이며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선택지를 뽑게 된다. 그 선택지가 정답이든 아니든 그 선택은 그에 따른 다양한 옵션과 수많은 인생의 기로를 바꿔놓을 열쇠가 되며 그 선택의 순간 머물렀던 사고의 과정과 시간들은 한 개인의 인생이 켜켜이 쌓이는 사이사이의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그 윤활유들은 또 다른 선택의 순간과 사고의 과정 속에 스며들며 또 다른 선택과 판단의 울타리를 이룬다.
모든 인간은 끊임없는 선택의 순간 속에 존재하며 우리가 사유하는 시간과 공간 또한 그 선택에 따른 환경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호주라는 선택지를 거쳐 또 다른 수많은 선택의 흐름들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인생의 몇 번 되지 않을 커다란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또 다른 호기심의 세계를 선택했고, 그 기간은 7일이 넘지 않았다. 7이라는 숫자는 삶이 우리에게 준 선택의 무게이며 이 무게를 견뎌낼 준비를 위한 빌미가 된다. 우리가 살아오고 쌓아온 세계를 숫자 7의 기간 속에 욱여넣고 또 다른 나의 길을 위한 마중물로 남은 인생의 주춧돌로서의 시간들을 준비했다.
일주일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나의 과거는 안정적인 성공한 삶이기도 했고, 아직은 도전이 부족한 열정적인 날이기도 했다. 40여 년의 기간이 7이라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삭혀지고 발효되고 다듬어졌다. 마치 40여 년 동안 천천히 익어가던 김치가 일주일 만에 순식간에 발효되는 듯한 시간을 거쳐 우리는 호주를 선택했고, 그리고 왔다.
일주일이라는 무거운 고뇌의 시간이 민망할 정도로 호주는 가벼웠고 밝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당연히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했던 것처럼 날씨로 반겼고,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듯이 우리 주변에 얼추 있을 법한 이웃들로 맞이했다. 크고 작은 수많은 준비 과정들이 호주를 무거운 미지의 세계가 아닌 밝고 가벼운 설렘으로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터를 잡은 우리들은 또 다른 삶을 선택한 책임감에 걸맞게 삶의 테두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채우고 집기들을 사고 주변을 탐색했다. 마치 정글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공룡의 뼈를 탐사하는 고고학자처럼 우리의 삶의 터전이 되기로 한 호주의 한 시골 동네를 샅샅이 그리고 정밀하게 뒤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설레었고, 짜릿했다. 첫사랑처럼.. 처음 맛본 자극적인 사탕처럼 두렵지만 여운이 긴 그 설렘은 점차 내 공간에 스미어 내가 가져온 친밀하고 안전한 기운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설렘들이 또 다른 나의 온전함과 익숙함이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긴장감은 처음으로 오른쪽 운전대를 잡는 순간 극에 달했고, 지구 반대편을 질주하는 반대편 운전대의 차 안에서 도로 위를 달리는 시한폭탄이 되었다. 내가 왜 이 먼 곳까지 왔으며 운전은 괜히 한다고 했다는 원망과 이놈의 나라는 도로 표지판과 신호등이 엉망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비판과 잡설들로 차 안의 공기를 가득 메운 채 달리고 또 달렸다. 비루한 한 몸 누일 침구류를 사기 위해 반대편 운전대를 잡고 달렸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것저것 배를 채울 먹거리를 사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표지판이 가득한 호주의 시골길을 헤매었다. 문화인으로서 밥만 먹고는 못 산다며 학교, 도서관, 공공기관을 누비며 운전대를 놓지 못했다.
그리고...... 호주에 도착한 지 14일 즈음...... 얼추 집은 살만하게 갖추어졌고, 옷가지며 먹거리도 사람다워질 무렵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신호등 대신 있는 호주 도로의 라운드 어바웃을 부드럽게 코너링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멈춰 준 호주 할머니를 위해 손인사를 하는 여유까지 장착한 채..... 그렇게 우리는 호주에 도착하고 14일 만에 사람다워졌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하고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던 호주는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었고, 투덜투덜 불만과 긴장감으로 채우던 하루하루는 14라는 숫자와 함께 안정감으로 바뀌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어디든 무엇이든 누구이든 나의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친밀함이 되고 익숙함이 되며 삶이 되어간다. 그렇게 호주 빅토리아주의 드로인이라는 작은 마을은 우리의 삶이 되었다.
삶은 적응의 과정이고 그 작은 과정들은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된다. 7일의 결정의 시간을 거쳐 호주에 왔고 14일의 적응기간은 우리를 호주의 단기 거주 시민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작은 선택과 과정들이 호주 시골의 하루하루를 채우며 하루하루와 달을 바꾸었고, 계절의 흐름조차 익숙해질 무렵 나는 이제 그동안의 시간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300일의 시간을 머물렀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출발로 온갖 느릿느릿한 것들로 가득한 호주의 시골마을을 거쳐 아름다운 자연과 친절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익숙한 스위트 홈으로 돌아오기까지 300은 그렇게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매일매일이 모험이고 처음이며 새로움이었기에 하루하루를 손으로 꼽거나 숫자로 세어보지도 못했기에 갑작스럽게 더듬어보는 나의 호주에서의 숫자들이 새롭다. 7의 긴장감과 14의 두려움은 300의 친숙함을 가져다주었고 또 다른 기록으로 가득할 숫자들을 기대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호주 생활을 또 어떤 숫자들로 채워질까..... 그 숫자가 무엇으로 채워지든 그 또한 인생의 의미 있는 무엇이 될 것이며 호주를 추억하는 재미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호주에 도착한 지 300여 일이 지난 오늘 너무도 자연스럽게 호주 한적한 시골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을 나와 반대편 운전대를 잡고 친절하고 미소 가득한 이웃들이 가득한 동네 도서관으로 마실 나온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래서 참 흐뭇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