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아온 허기
남반구에서도 김치가 진리
남반구의 태양은 북반구가 겨울을 향해 갈 무렵에도 오후 늦은 시각까지 그 자태를 뽐내며 뜨겁고 붉은 기운을 남긴다. 집 안 깊숙히 들어온 붉은 태양은 다채로운 빛으로 벽면을 물들이다 암흑보다 더 검은 밤의 어둠으로 서서히 밀려난다. 무시로 채워지는 어둠의 빛이 세계를 덮을 무렵.............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고단하고 피로한 몸의 기운을 이기고 뇌를 깨웠다. 강하게 느껴지는 이 느낌..... 어딘가 친숙하고 친근하면서도 묘하게 강한 해결 욕구를 느끼는 이것은....... 배고픔...부스스 일어나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깨지는 않을까 한껏 까치발을 세우고 숨을 참았다. 내일 아침부터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건 아이들 뿐만이 아닌데 나는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새벽녘에 몸을 일으켰다. 누구라도 깰세라 조심조심 주방으로 나와 킁킁거리며 허기를 해결할 무언가를 탐색했다. 그 때 '삐그덕~'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감각은 허기짐이 가져다 준 예민함이리라......어디서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 저기 방문이 열린다. 각자 방에서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는 나의 동지들의 퀭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강한 욕구... 지구 반대편의 중력도, 달의 인력도, 암흑보다 검은 밤의 어두움도, 빡빡한 스케줄의 고단함도 이겨내며 피곤함에 지쳐 축 처진 사지를 들어올릴 힘으로 거듭나게 하는 태초의 욕구.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명은 팬트리를 한 명은 냉장고를 또 한 명은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구석기 시대의 사냥감을 찾던 동굴인들이 그랬을까, 자연스레 밀려오는 허기짐을 다스리려 욕구에 몸을 맡기자 말 한디 없는 공간은 오직 본능에 충실한 동굴이 되었다. 우리는 소리없이 호주 땅에서 귀한 몸 값 자랑하는 라면을 팬트리에서 낚아오고 금쪽같은 김치를 냉장고에서 공수하며 찬장에서 꺼낸 냄비에 20년 경력으로 다져진 눈대중으로 라면물을 올렸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이 모둔 행위는 허기짐을 달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서 시작되었으며 같은 고통과 목표를 가진 우리는 전우애를 느끼며 식탁을 셋팅했다.
각 나라는 그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 등으로 버무려진 특유의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나라를 방문하면 의레껏 그 지방 또는 그 나라의 음식을 맛보고 음식문화를 체험한다. 이를 통해 그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고 지역적, 역사적 특징들을 두루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나 또한 다른 나라를 여행하거나 다른 지역을 방문하면 그 지역, 나라에서 유명한 음식을 맛보기 위해 식당을 방문하여 그들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엿보아 왔던 터이고 나름 인터네셔널 푸드에 너그러운 입맛을 가지고 있어 향신료와 특유의 그 지역 풍미 등을 즐길 수 있었다.
호주는 영국의 영향을 받아 흰 살 생선과 감자튀김을 한 접시에 담아 간단한 한 끼를 해결하는 '피쉬 앤 칩스'가 일반화 되어 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부터 시티의 유명한 식당에 이르기까지 간단하지만 다양한 소스를 이용한 여러 종류의 피쉬 앤 칩스를 즐길 수 있다. 그 외에 독특한 동식물과 광활한 영토, 섬나라의 특징을 살려 그들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발달시켜 온 호주는 다민족 이민국가답게 다양한 인터네셔절 푸드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호주는 백인들의 음식문화와 원주민인 '에버리진'의 식문화와 더불어 세계의 모든 음식을 믹스 앤 매치하는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식문화가 존재하는 신기한 나라이다.
대표적으로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양고기 등 취향에 따라 다양한 고기와 양파, 당근 등의 야채를 갈아 파이 껍질에 넣어 만드는 '미트파이'는 그 고기와 야채의 종류만큼이나 많은 소스로 그 종류만 수십가지에 이르며 미트파이 전문점과 유명 체인이 호주 곳곳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소나 양의 콩팥과 야채등을 이용한 '키드니파이', 악어고기를 이용한 '악어크림파이' 등 각 지역과 재료에 따라 파이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또한 육류의 세계적인 생산국이자 세계 1위의 육류 소비국 답게 돼지고기, 소고기, 양고기를 비룻하여 악어, 에뮤, 캥거루 등 일반적인 고기와 호주에서만 서식하는 고기를 이용한 다양한 스테이크 또한 그 유명세에 한 몫을 하고 있다.
근래에는 호주 원주민인 '에보리진'이 5만 년 동안 호주 대륙에서 형성해 온 음식문화의 뿌리를 연구하고 호주의 문화로 받아들이면서 특별한 그들만의 식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다. 에보리진들은 호주의 광활한 대륙을 누비며 그들만이 알고 있는 대륙의 동식물과 약초, 과일 등을 이용한 소스, 향신료 등의 식재료를 발달시켰고, 곤충과 파충류 등 세계 어디에도 없는 그들만의 특별한 요리문화를 이어왔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하고 창의적인 식문화에도 불구하고 에보리진의 음식은 최근에야 새로운 요리를 찾는 트렌드와 에보리진 문화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이해하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부쉬터커'라는 이름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이 처럼 짧은 역사를 가진 호주의 음식문화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땅덩어리만큼이나 호기심과 잠재력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에보리진의 유구한 역사와 다양한 나라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가진 호주는 인터네셔널한 입맛을 가진 나에게는 천국일진데....... 고기와 파이라는 새로운 조합도,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맛 볼 수 있다는 다국적 식탁도 보름을 넘기지 못했다. 호주에 온 이상 호주인처럼 먹으리라 마음 먹고 아침은 토스트, 점심은 동네 러시아 음식점의 블리니를 즐기며 저녁은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문화체험이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인터네셔널 푸드를 즐기고 호주의 음식문화에 흠뻑 젖어보았지만 이상한 허전함이 내 안에 맴돌았다. 육체는 새로운 음식물로 가득찼지만, 영혼의 허기짐은 점점 커져만 가는 듯.
인간의 세포 하나하나에 켜켜이 쌓여 있을 영양소와 에너지는 음식으로부터 나온다. 생명이 잉태된 순간에는 모태의 세포로부터 전해져 온 유전자에 포함된 영양소와 에너지가 그 근원이 되고, 그 근원은 모태에서 모태로 그리고 또 모태로 그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고로 나의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에 곁들여지고 켜켜이 쌓여 근원이 되는 영양소와 에너지는 나의 뿌리와 그 결을 함께 할 것이고 나의 뿌리인 한국인은 고추가루와 야채의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김치를 세포에 차곡차곡 쌓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찾아온 이 허기는 운명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며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말이다. 호주에 도착한 이후 살이 무럭무럭 올라와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영혼까지 끌어모아 나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운명적 끌림에서 오는 허기일 뿐.......... 무언가 변명같지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호주 땅에서의 허기는 그 동안 한 번도 채워지지 않은 양 절절하고 애절했으며 호주의 식문화와 에보리진의 5만년 역사를 훑고 태초부터 나의 세포와 영혼까지 지켜왔을 한식과 김치의 운명을 생각하기까지 이르게 했다.
끓고 있는 라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도 이것과 곁들여져 나와 하나 될 시간에 흥분하게 만드는 것, 허기로 시작된 다이나믹한 생각의 흐름을 따라 나는 결국 한국인임을 자부하게 만드는 맛, 세상 어디에서도 이것 없이는 만족할 수 없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남반구의 하늘 하래 호주 땅에서도 김치가 진리인 듯 했다. 금값 같은 마트 김치 한 사발에 만족하며 인터네셔널 입맛을 외치던 나를 벗어버리고 우리는 주말에 김치를 담그기로 했다. 자고로 한국인은 김친가 진리인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