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계절을 좋아하세요?

by 김필필

뛰쳐올라 날아갈 듯 생동하는 땅의 기운과 강렬하고 뜨거운 공기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처절하게 내리꽂던 장맛비도 한 풀 꺾여 이제 본연의 자태를 고이 드러낸 젊음의 계절..... 세상의 모든 것이 생장하고 소멸하듯 계절도 그러하겠지....


어렸을 적 사람들이 즐겨 묻는 질문 중에 '어느 계절을 좋아해'가 있었다. 취미나 나이를 묻듯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질문이었고, 나의 답변 또한 찰나의 시간이 흐른 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늘 '여름'이었다.


그냥 좋았다. 여름이........ 뜨겁게 이글거리는 태양도, 아스팔트에 녹아 흐르듯 흐물거리는 도심의 아지랑이도, 땀 없이는 걸어 다닐 수 조차 없었던 숨 막히는 한낮의 거리도, 시원한 바람 한 점을 쫓아 방황하는 여름밤의 낭만도, 파도 소리로 위안을 삼으려 달려가던 휴가철 찜통 같은 차 안도, 또 거기서 즐겨먹던 싸구려 간식들도..........


다른 계절과는 달리 여름을 맞이하는 거창한 통과의례인 장마가 있어서일까? 여름을 대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마음은 늘 설렌다. 장마가 시작될 즈음엔 온몸의 신경들이 계절을 느끼고 바람 한 점과 공기 중에 떠다니는 빗방울 양에 따라 기분이 둘쑥날쑥 춤을 춘다.


장맛비에 넘쳐나는 도로의 빗물을 거슬러 올라갈 때면 발가락을 간질이던 자질구레한 스티로폼 조각이나 나뭇가지, 흙모래들이 슬리퍼와 발바닥 사이에 끼이곤 했다. 그들의 까슬거리고 질척대는 이물감이 싫지 않았다. 다른 계절이었다면 절대 발바닥과 닿지 않았을 미지의 세계에서 온 것들이 말초의 감각을 건드리고 저 멀리 기억 파편 속에 똑같은 장면과 감각과 느낌을 불러올 때면 나도 모르게 첨벙첨벙 빗물을 튀기곤 했는데... 그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기란 세월이 참....

음.... 무디다....


똑같은 것들의 반복이 가져오는 단조로움, 비슷한 일상과 예상 가능한 사건들로 가득 찬 우리의 삶들은 작고 신비롭고 의외의 것들로 넘쳐나는 우주를 너무나도 가볍게 무시하곤 한다. 빗물에 휩쓸린 슬리퍼 속 모래알들은 더 이상 귀하고 반가운 존재가 아니라 빨리 털어버려야 할 귀찮은 장마의 찌꺼기가 되었고 치열하던 한여름의 정취들은 에어컨 아래 심심한 일상 속에 묻히게 된다.


나는 어느샌가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 질문에 쉽사리 답변을 못하게 되고 본능과 즉흥의 앙상블은 이성과 관성의 익숙한 관현악에 묻히게 된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봄은 그 이름의 의미가 있을 테고, 무르익은 가을의 낙엽길을 가을 여자가 되어 트렌치코트 자락 휘날리며 가로질러보고도 싶다. 새하얀 눈 밭과 연말연시의 설레는 정취 또한 사뭇 로맨틱하여 가슴을 찌르르르 건드리는 것이 세월의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나의 주책은 아닌가 싶다.

직장인의 숙면은 아랑곳 않고 무심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내지르던 새벽 3시의 매미 울음소리에 문득 치열하고 강렬하고 압도적인 계절이 가슴속으로 훅 들어왔다.

그래도...... 아직은 여름이 좋다...... 아직 젊다는 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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