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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가 기억되는 순간은 따로 있다

by 량과장

8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직구장을 찾았다.

그날 롯데는 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팀을 응원했다.

경기 후 아쉬워하던 아버지의 표정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일까.


내가 야구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팀은 언제나 롯데다.

그날의 장면이, 그날의 감정선이 아직도 내 마음 깊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억이 지니고 있는 힘은 강력하다.

그리고 이 힘은 브랜딩에서도 무기가 된다.


말은 공중에서 흩어지지만, 경험은 마음속 깊이 남는다.

브랜딩 과정에서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브랜드가 우연히 각인되는 일은 드물다.

반복되는 접점과 정서적 경험이 쌓여야 기억이 형성된다.

브랜드와의 첫 만남, 예상을 벗어난 순간, 그리고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경험이 축적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 브랜드를 기억한다.



사용자 경험, 행동경제학으로 설계해 보세요!



초두 효과(Primacy Effect)


기억은 맥락과 감정에 반응한다.

동일한 브랜드라고 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으로 만났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 현상을 초두 효과(primacy effect)라고 부른다.

첫 만남에서 형성된 인상이 이후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첫인상이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 아니라, 그 순간의 전체적인 경험과 감정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이다.


브랜드를 처음 마주한 순간,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따라 이후의 인식과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브랜딩에서는 고객과의 첫 만남을 설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Samuel Regan-Asante, Unsplash

Aesop 매장에 들어서면 의외의 경험을 하게 된다.

직원이 다가와 제품을 설명하지 않고, “필요하시면 말씀 주세요”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물러선다.


대부분의 화장품 매장에서 마주하던 적극적인 세일즈와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찰나의 순간에 몇몇 고객은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느낀다.


이 브랜드는 나를 압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브랜드의 철학과 태도를 보여주는 첫인상이 되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는다.

설령 고객이 제품을 사지 않더라도, 그들은 브랜드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가지고 매장을 나서게 된다.


실무 TIP
고객과의 첫 접점을 다시 점검하자. 고객이 브랜드를 처음 마주하는 순간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할지를 설계해야 한다.



예측 오류(prediction error)


많은 사람들이 Aesop의 조용한 접객을 ‘의외’라고 느낀다. 바로 그 ‘의외성’이 예측 오류(prediction error)를 만들어낸다.


브랜드가 기대와 다르게 행동했을 때, 그것이 불쾌함이 아니라 편안함으로 다가올 때, 사람들은 그 기억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는다.


기억은 익숙한 것보다는 낯선 것, 예상한 흐름보다 어긋난 순간에 더욱 강하게 형성된다.

예측과는 다른 상황이 생존에 위협이 되거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뇌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은 ‘완벽한 브랜드 경험’보다, 예상 밖의 순간, 의외의 반응, 엇갈리는 감정 속에서 더 강하게 만들어진다.


호주의 전자제품 매장 JB Hi-Fi는 예측 오류를 브랜딩 전략으로 적극 활용한 사례 중 하나다. JB Hi-Fi는 단정함,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매장이다.

진열대는 어수선하고, 손글씨 POP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직원들은 유니폼 대신 캐주얼한 티셔츠를 입고 자유롭게 고객과 이야기한다.


처음 이 매장에 들어서면 “이게 뭐지? “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Apple Store에 익숙한 고객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이 기억의 출발점이 된다.


물론, JB Hi-Fi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철저히 계산된 브랜딩 전략이다.

JB Hi-Fi는 의도적으로 고객의 예상을 벗어나게끔 경험을 설계했다.

어수선하고 다소 혼잡한 분위기를 연출해 ‘싸다’, ‘진짜 같다’, ‘접근하기 쉽다’는 인식을 고객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다.


예측 오류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다른 것’이다.

JB Hi-Fi의 어수선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저렴하고 진정성 있는 쇼핑 경험이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


실무 TIP
낯선 경험을 의도적으로 설계하자. 예측 가능한 흐름에서 한 걸음 벗어나야 고객의 기억에 남는 브랜드가 될 수 있다.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


우리는 모든 경험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감정이 가장 강하게 반응한 순간, 감정의 피크가 형성된 지점일수록 오래 기억에 남는다.


대니얼 카너먼은 이 현상을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어떤 경험을 떠올릴 때 경험 전체가 아닌 가장 강렬했던 순간과 마지막 순간을 회상한다.


@Josh Withers, Unsplash


코로나19 이전, 호주가 내 집처럼 느껴지던 시절.

Qantas 항공의 기내 방송은 늘 마음을 흔들었다.

호주 상공에 진입하는 순간 들려오는 한마디.


Welcome home.

그 짧은 인사는 심리적 안정감과 정서적 귀환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들리던 이 두 단어는 Qantas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비행은 끝이 났지만, 감정의 정점에서 들려온 그 한마디는 여정의 마지막 인상으로 남았고, Qantas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도 가슴속 깊숙한 곳에 싹텄다.


모든 여정을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피크 그리고 엔드 구간을 설계하는 것은 가능하다.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리고 여정이 끝나기 직전에 어떤 메시지를 남겼는지에 따라 브랜드의 임팩트가 달라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브랜드는 모든 순간이 완벽했던 브랜드가 아니라, 감정을 동하게 했던 브랜드다.


실무 TIP
감정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전달할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정교하게 기획하자. 그 한 문장을 브랜드 이미지를 결정한다.




브랜딩의 본질은 경험을 설계해 기억에 남기는 것이다.

고객이 브랜드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까지, 모든 접점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할 것인지를 촘촘히 설계해야 고객의 기억 속에 브랜드가 자리 잡도록 만들 수 있다.


완벽한 경험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드는 것.

예상 가능한 서비스가 아니라 의외의 감동을 주는 것.

그리고 그 감동이 브랜드의 정체성과 일치하도록 조율하는 것이 브랜딩이다.



우리는 브랜드가 무엇을 말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브랜드가 제공한 경험은 기억한다.

고객에게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은지를 먼저 고민해 보자. 그 안에 브랜딩 전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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