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직장은 글로벌 금융 서비스 기업이었다.
이름만 말하면 다들 아는 곳.
엄마는 드디어 회원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며 기뻐하셨다.
첫 출근 날, 나는 마치 내가 월스트리트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높은 빌딩, 반짝이는 로비, 갖춰 입은 사람들. 나는 내가 진짜 성공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어딜 가나 사내 괴롭힘은 있고, 그 대상이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첫 상사는 인도인이었는데, 그는 나를 개인 비서처럼 다뤘다. 매일같이 불가능한 업무량을 던져 주고 너는 한국인인데 왜 암산을 못 하냐고 구박했다.
나는 인도인도 숫자에 강한데 왜 당신은 숫자에 약하냐는 말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속으로 삼켜야 했다.
매일 오후 3시만 되면 그는 내게 "Can you stay a little longer today?"라고 물어왔고, 'a lttle'은 'a little'이 아니었다. 나는 점점 녹초가 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폭발했다.
루저의 탄생
나는 결국 괴롭힘을 못 견디고 퇴사를 택했다. 이후 내게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인도 음식을 못 먹게 되었다는 것.
퇴사 후 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싶었다. 대학 시절 마케팅 과목 교수님이 ‘너는 졸업 후 마케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마케팅으로 가자!”
나는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미친 듯이 넣기 시작했다.
하루에 10개, 일주일에 70개. 꿈에서도 커버레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거절, 거절, 또 거절.
간혹 면접 기회를 주는 곳이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We’ll be in touch”라는 말이 “Don’t call us, we’ll call you”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글로벌 금융 서비스 회사의 유망주에서 루저가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한순간에 집에서 넷플릭스나 보는 백수가 되어버렸다.
넷플릭스가 바꾼 내 인생
이력서를 넣다 지쳐 넷플릭스를 뒤적이던 밤. 그날 밤이 내 인생을 바꿨다. 『제시카 존스』를 보게 된 것이다.
“뭐야, 이건 또?” 하며 클릭한 마블의 드라마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줄지 누가 알았겠는가.
드라마 속 제시카 존스의 직업은 사설탐정이었다. 매일같이 술 마시고, 짜증 내고, 사람들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이 그녀의 생업이었다.
“저런 게 진짜 자격증이 있나?”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구글링을 시작했고, 발견했다! ‘Cert III in Investigative Services’라는 자격증이 정말 존재한다는 것을. 구글은 내게 이 자격증을 따고 라이선스를 신청하면 진짜 사설탐정이 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유레카! 그 순간 촉이 왔다.
“이거다!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거다!”
금융 업계도 아니고, 마케팅 업계도 아닌, 다른 무언가!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날 밤 나는 제시카 존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직업적 관심을 섞어서 말이다. 그녀의 모든 행동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진짜로 돼버린 사설탐정
나는 다음 날 곧바로 Cert III in Investigative Services 과정에 등록했다. 수업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감시 기법, 증거 수집, 법적 절차. 마치 스파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첩보 요원이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리하여 받게 된 자격증.
자격증을 전달받고 라이선스를 신청한 후 나는 진짜 사설탐정이 되었다! “Private Investigator”라는 단어가 박힌 라이선스를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제시카 존스, 고마워!
당연히, 실제 탐정으로 일도 했다. 처음에는 이혼 케이스, 그다음에는 보험 케이스. 생각보다 수입도 괜찮았다.
아시아인 초보 탐정의 고군분투
당연히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나는 아시아인이고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일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기업들은 대부분 크고 덩치 좋은 남성을 원했다. 영화에서 보던 그런 탐정.
그러나,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믿어온 나는 “무급으로라도 써 달라”라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그리고 의외로 이 전략이 먹혔다. 그중 한 곳에서 내 의욕을 높게 사서 일을 맡겨 주기로 한 것이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아, 번외로 실제로 일을 할 때는 작은 체구가 도움이 됐다. 눈에 덜 띄었거든.
창업한 사설탐정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는 창업을 했다. 독립을 결심한 것이다. 대학 시절의 사이드잡 경험을 살려 광고도 직접 돌렸다. 회사 이름은 ‘All Eyez On You’였다.
광고를 잘해서였나. 진짜 문의도 들어왔다. 내 꼼수는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여성 탐정을 찾는 클라이언트들만 쏙쏙 타깃팅해 문의율을 높였다.
창업 후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은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었다. 바람피우는 사람들의 공통점, 보험 사기 치는 사람들의 특징,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몸짓. 비합리적인 행동에서 보이는 나름의 패턴이 흥미로웠다.
사설탐정 일은 재미있었지만, 점점 더 큰 케이스를 다뤄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탐정으로 일하며 증거만 잡아서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로스쿨에 가기로 했다. 당장의 수익과 미래 비전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했지만 결국 입학을 결심했고, 제시카 존스에게 낚여 시작했던 탐정 생활은 로스쿨이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자연스럽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