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에 들어간 이후 나는 내 삶이 탄탄대로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연히 이 길이 내 길이리라 여겼다. 한국이 그리울 때마다 졸업 후 귀국하면 어떻게 나아가야 가장 유리할지 검색해보고는 했다.
사망 플래그
로스쿨 시절 내 일상은 너무나 평온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면 캠퍼스로 향했고, 라이브러리에 들러 책을 뒤적이고,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가끔 유니바에서 코로나를 들이키며 포켓볼을 치거나 급전이 필요할 때 외주를 받아 소소하게 경제활동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학업에 매진했다. 그러나,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던 내게 또다시 불운이 닥쳤다.
깜짝 선물
어느 새벽 한 운전자가 내 차를 냅다 들이박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드레일을 뚫고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내 차는 곧바로 사망 상태에 이르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와 내 차를 수렁텅이에 빠지게 한 그 망나니는 만취 상태였다고 한다.
나는 평소 액션 영화를 즐겨 보았다. 액션 영화를 보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내가 주인공 포지션이 되니 정말 단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스턴트맨도 없고 CG도 없는 리얼 액션이었으니 말이다.
강제 포맷
그래도 어떻게 죽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눈을 뜬 장소는 대학병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상황 파악을 하려 했던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그 모습을 본 간호사가 내게 다가와 일주일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했다고, 다리는 골절되고 갈비뼈는 부러진 상황이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과제 때문에 밤을 새우기 일쑤였는데 168시간을 연속으로 안 깨어났단다. 삶이라는 놈이 나를 강제로 셧다운 시킨 모양이었다.
전화 테러
오랜 잠에서 깬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휴대폰을 찾아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이었다. 휴대폰에는 당연히 몇백 통의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었다. 엄마였다. 나는 급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엄마, 나야.”
“어디 있었어! 왜 연락이 안 됐어! 비행기 타려고 했잖아!”
국제전화 배틀로얄
내가 목발을 짚고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태가 되자 엄마는 그냥 한국에 들어오라고 했다. 몸이 그런데 왜 호주에 있냐고. 몸이 먼저 아니냐고. 네가 죽으면 로스쿨이 뭐가 의미가 있냐고.
“엄마, 나 괜찮다니까. 마지막 학기만 남았어.”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갈비뼈가 부러진 게 괜찮은 거야?”
“치료받으면서 학교 다닐 수 있어.”
“안 돼. 당장 한국 들어와. 엄마가 죽을 것 같아.”
몇 날 며칠 전화기 너머로 고성이 오갔다. 내가 한국에 가면 도대체 뭘 할 수 있냐고 엄마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지금까지 뭐 하러 여기 있었는데!”
“목숨이 더 소중하지 않냐!”
“한 학기만 더 하면 졸업인데!”
“졸업장이 관짝이냐!”
엄마의 표현력은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됐다. “관짝”이라니. 당시 국제전화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호주-한국 간 장거리 모녀 설전이 끊이지를 않았으니까. KT는 우리 집 덕분에 한동안 실적이 좋았을 거다.
엄마의 백기투항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백기를 들었다.
“그럼 조심해서 해. 무리하지 말고.”
엄마는 결국 물러섰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내 딸은 정말 고집불통”이라는 체념이 묻어있었다.
승리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설득한 것이 아니라 지치게 만든 것 같았으니까. 마치 토론 대회에서 부전승을 한 기분이었다.
코로나19라는 최종 보스
그런데 하필 그 시기에 팬데믹이 터졌다. 더 이상 무엇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셧다운 됐다.
마트에서 여자 둘이 서로 휴지를 가져가기 위해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 찍힌 영상이 바이럴 됐던 것도 그맘때쯤의 일이다. 팬데믹이 도래한 타이밍은 기가 막혀도 정말 기가 막혔다. 엄마에게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라고 선언하니 세상이 “어디 한번 해보시지”라고 응수하는 듯했다.
그 시기 수업은 온라인으로 전환됐고, 도서관도 문을 닫았다. 친구들과 만날 수도 없었다. 깁스한 다리로 집에 갇혀서 또 또 넷플릭스나 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넷플릭스도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내 몸의 2차 파업
깁스를 푼 후에도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프고, 계단 오를 때마다 다리가 욱신거렸다. 무엇보다 집중력이 완전히 망가졌다. 전에는 교과서를 몇 시간씩 읽어도 멀쩡했는데, 이제는 30분만 읽어도 머리가 아팠다.
판례를 살펴보다가도 자꾸만 딴생각이 났다. “만약 내가 사고를 당해 죽었다면 어떤 판결이 나왔을까?” 같은 쓸데없는 상상들.
그 와중 내 몸은 “야, 너 지금 무리하고 있어”를 외치며 또다시 파업할 기미를 보였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고 과거의 잘못을 반면교사 삼아 나는 한국행을 선택했다. 엄마는 내 결정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래, 당장 와라. 내일이라도 와라.”
그 말에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대성통곡을 하는 나에게 엄마는 말했다. 네가 무슨 유치원생이냐고.
나는 결국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로스쿨의 관짝 뚜껑을 닫았다. 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내 몸과 세상이 동시에 ‘그만하라’고 말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졸업장이 떠났고, 그 자리는 병원 영수증과 국제전화 요금 고지서가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