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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새우팔이였다

by 량과장

한국에 돌아온 나는 직업을 구해야 했다. 언제까지고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금융업계로부터 도망쳐 나온 후 로스쿨까지 때려치운 나에게 남은 것은 영어뿐이었다.


나는 영어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학원 수십 개에 이력서를 넣었고 시범 강의를 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 호주 악센트가 너무 강해서 알아듣기 어렵고 학부모는 미국식이나 영국식 악센트를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 하나로 나는 또 한 번 끊임없이 거절당해야만 했다. 내가 해외 영업, 해외 마케팅 분야로 눈을 돌린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새우와의 첫 만남


결국 나는 수산물 무역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사실 원해서 한 선택은 아니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면접에서는 당당하게 거짓말도 했다. “저는 새우 좋아합니다!”라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대담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물아래 생물들이 무서워 길 가의 횟집 수족관만 보여도 도망 다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취업이 절실하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하는구나 싶었다.



새우 전문가


입사 첫날,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내 책상에는 해산물 카탈로그가 에베레스트 산처럼 쌓여 있었고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새우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날 처음 뵌 과장님께서는 친절하게 “이게 우리 주력제품이에요! “라며 새우 샘플을 들고 오셨다. 나는 얼굴 근육을 총동원해서 미소를 짓고 “와, 얘가 주력제품이구나! “라고 답했다.


내 주요 업무는 해외 바이어들과 소통하고 가격을 협상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모든 대화의 주제는 수산물이었다. “새우의 사이즈는 어떻게 되고, 프리징 컨디션은 어떻고…” 점점 새우 전문가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누끼와의 전쟁

사실 진정한 고통은 제안서를 만들 때 비로소 찾아왔다. 새우 다리를 클로즈업해 누끼를 따야 했는데, 픽셀을 확대할 때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새우 다리에 덕지덕지 붙은 털을 보며 ‘이게 새우팔이의 인생인가’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화장실로 도망쳐 “괜찮아, 너 할 수 있어”라고 멘탈 케어를 했다.



새우팔이의 성과

아이러니하게도 일은 잘됐다. 내가 쓴 이메일에 바이어들이 답장을 보냈고, 제안서 하나로 프랜차이즈 피자 회사와의 가계약을 성사시켰다. 대면 영업도 없이 말이다. 사장님은 “역시 고학력자는 다르다! “라며 기뻐하셨고 나는 속으로 ‘아니에요, 포비아의 힘이에요’라고 답했다.


이후 나는 홈페이지도 리뉴얼하고 스마트스토어도 운영하게 됐다. 온종일 새우 사진과 씨름하면서 상품 페이지를 꾸몄다. 리뷰에 “새우가 정말 맛있어요! “라는 댓글이 달릴 때면 ’ 여러분, 제가 이 새우들을 얼마나 무서워하면서 팔고 있는지 아세요?’라고 묻고 싶었다.


친구들에게도 종종 말했다. “나 새우팔이야.” 자기 비하 같았지만 사실 자랑이기도 했다. BL부터 해외 계약서 검토, 마케팅까지 영향력을 행사했고, 무역팀 팀장이라는 타이틀도 있었다. 사장님도 나를 신뢰했고 월급도 나쁘지 않았다. 새우만 무섭지 않았다면 완벽한 직장이었을 텐데.



새우와의 이별


그렇다고 평생 새우를 팔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매일 출근해서 새우와 인사하고, 새우를 논하고, 새우 꿈을 꾸며 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더 이상 새우와 썸 타고 싶지 않았고, 다른 분야의 마케팅을 경험하고 싶었다.



새우팔이에서 네이버의 딸로


다음으로 내가 입사한 곳은 플랫폼 서비스 스타트업이었다. 나는 드디어 새우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다. 컴퓨터 화면에 새우가 나타날 일이 없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내 주요 업무는 콘텐츠 마케팅이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SNS를 운영하고 네이버 포스트도 관리하고. 새우팔이 시절의 악몽 같은 경험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나는 늘 ‘새우도 팔았는데 못 팔 게 뭐가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업무에 임했다.


그래서였을까. 100일도 채 되지 않아 기적이 일어났다. 내 네이버 포스트 글이 계속 메인에 떴다. 3일에 한 번씩. 주변 사람들이 나를 “네이버 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새우팔이에서 네이버 딸로 화려한 전직이었다.



아이러니 끝판왕


내 글이 메인에 또 떴다는 소식에 나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하며 거만을 떨었다. 나는 그날 회의에서 “우리가 곧 문을 닫는다”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얼마나 클래식한 엔딩인가. 내가 네이버 메인을 휩쓸고 있는데 회사는 조용히 문을 닫다니. 억울했던 나는 더 큰 물에서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한 길이 상경이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짐을 싸며 새우팔이 시절을 되돌아봤다. 공포에 질려있으면서도 일은 잘했던 그때를. 극복은 못했지만 버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친구들은 지금도 믿지 못한다. “네가 진짜 새우를 팔았다고?” 그렇다. 나는 수산물 포비아 환자지만 새우를 팔았다. 나는 받아들였다.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내 인생이라는 사실을.


서울행 KTX 안에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만든 홈페이지는 여전히 굴러가고 있을까? 내 후임은 새우를 사랑하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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