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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은 올랐지만

by 량과장

첫 회사에서 나는 신입이 아니라 전사 지원 인력처럼 굴러다녔다. 열두 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돌리며, 온드미디어, 뉴스레터, 프로모션 페이지, 키비주얼, 제안서, 페이스북 운영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낮에는 회의실을 전전하고, 밤에는 기획안에 붙잡혀 있는 삶. 내게 잠은 사치였고, 집은 그냥 주소지였다. 간이침대도 없이 사무실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잠든 날이 수두룩했고, 한 달 내내 집 문턱을 밟지 못할 때도 있었다. 집순이가 홈리스가 된 셈이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많이 힘들죠?”라고 묻지 않았다. 그런 말이 먹히지 않는 분위기였다. 버텨야 했고, 버티는 사람이 ‘성장하는 사람’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광고 대행사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PPL 대행사에서부터 부동산 온라인 광고 대행사, PR 대행사, 퍼포먼스 광고 대행사, B2B 전문 대행사까지. 6년간 일곱 번 이직하며 대행사를 전전하는 유목민이 되었다. 마치 대행사계의 떠돌이 용병 같았다.


회사에 불만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시장 이론에 따라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곳으로 환승했을 뿐이다. 몇 차례 이직을 하다 보니 내 연봉은 첫 직장 대비 2.5배 높아졌고,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어? 이게 내 돈이야?” 싶었다.


그러나 돈이란 참 아이러니한 친구였다. 통장 잔고가 늘어날수록 돈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떨어졌다.



야근이 내 본업


단기간에 연봉을 2배 올릴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했다. 내가 사무실의 마지막 전등을 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오후 두 시는 내게 두 번째 점심시간이었다. 진짜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으니까. 정규직이 아니라 ‘야간 전담 직원’인 셈이었다.


“먼저 가세요, 저는 조금 더 할게요.”


조금이 3시간이 되고, 3시간이 새벽 2시가 됐다. 택시비 지원을 받으려면 밤 10시 이후에 퇴근해야 한다는 회사 규정을 잘 활용했다고 해야 할까. 나는 매일 택시비를 챙겨 갔다.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오늘도 고생했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사실 고생이 아니라 일종의 중독이었다. 일하지 않으면 불안했거든.



신규 프로젝트 담당 일진


그래서일까. 어느 회사에 가든 나는 ‘그 사람’이 됐다. 뭔가 급한 일이 생기면 나를 찾았고, 신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나를 불렀다. 조직 개편 때마다 내 이름이 거론됐다. ‘인간 119’가 된 기분이었다.


“이건 얘가 해야 해.”

“얘 없으면 안 돼.”


인정받는다는 쾌감은 달콤했다.


그러나 ‘키맨’이 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급한 일은 내 차지, 모든 책임도 내가 져야 했다. 성공하면 팀의 공, 실패하면 내 탓.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줄 몰랐다.



감정의 사망선고


어느 순간부터 내 감정이 메말라 가기 시작했다. 좋은 결과가 나와도 “그래, 당연하지”였고, 나쁜 결과가 나와도 “뭐, 어쩔 수 없지”였다. 나는 고장 난 로봇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동료들과 회식을 해도 재미가 없었다. 다들 일 얘기를 하는데, 나는 이미 그 일을 다 해봤거든. 새로울 게 없었다.


“요즘 뭐가 제일 재밌어?”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답하기가 어려웠다.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통장의 배신


수익은 나날이 늘어났지만 쓸 곳이 없었다. 여행을 가려해도 휴가를 쓰기가 미안했다.


결국 돈은 통장에만 쌓였다. 마치 적금 통장을 위한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번 돈을 도대체 언제 써?”


혼자 중얼거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모든 시간을 쓰니, 정작 돈을 쓸 시간이 없었다.



인간미 증발


시간이 지날수록 내 성격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예전에는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를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왜 미리 안 말씀하셨어요?”라고 따지는 사람이 됐다. 성격도 회사 업무처럼 효율화된 듯했다.


효율성을 추구하다 보니 감정적 여유가 사라졌다. “감정 소모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차갑고 계산적인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동료들은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존중받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사람들은 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돌아온 몸의 경고


이런 생활이 6년째 지속되자 몸이 다시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온몸이 천근만근이었고, 계단 오를 때마다 숨이 찼다. 목과 어깨는 늘 뻣뻣했다.


“설마 또?”


대학 시절 자반증, 호주에서의 교통사고. 나는 이미 두 번이나 몸에게 배신당했다. 설마 세 번째는 아니겠지?


하지만 몸은 정직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밤에 잠이 안 왔다. 스트레스성 위염도 찾아왔다.



성공한 실패자


결국 내 연봉은 올랐지만 삶의 질은 떨어졌다. 인정을 받았지만 친구는 잃었다. 전문성은 늘었지만 내 삶은 없어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래서 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성취가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밤늦게 혼자 사무실에 앉아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중얼거렸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성공했다는데 왜 이렇게 외로울까.




서울은 나에게 통장 잔고와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선물해 줬지만, 그 대가로 내 영혼을 조금씩 앗아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그 거래가 손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인생 최악의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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