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이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내게도 구미가 당기는 기회는 찾아왔다. 꽤나 규모가 큰 프로젝트의 기획 담당자로 지정된 것이다. 계약이 성사되면 회사 매출이 1.5배는 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모든 직원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나는 축배를 들었다. 나는 내가 드디어 대박을 터뜨렸다고 생각했다.
대표님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역시 우리 에이스”라고 했을 때, 나는 이미 성공한 기분에 도취되어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한 마디 덧붙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2 주형 선고
“아, 그런데 저희 론칭이 2주 후예요. 전체 캠페인 기획부터 크리에이티브까지 다 포함해서요.”
2주? 나는 속으로 계산해 봤다.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으면… 그래도 빡빡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산물인 나는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 “네, 문제없습니다!”
나는 또다시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카페인과의 동거
커피머신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길어졌고, 하루에 아메리카노를 4잔은 거뜬히 들이마셨다. 편의점 직원들도 나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2시에 에너지드링크를 사러 오는 그 언니.
식사는 연료가 된 지 오래, 잠은 사치가 됐다. 침대는 주말에나 가끔 만나는 옛 연인 같은 존재가 됐고, 사무실 의자가 내 새로운 침대가 됐다.
괴물 등극
나는 하루에도 백 번씩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는 주문을 읊조렸다. 동료들은 나를 ‘괴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밤샘 3일 차가 되던 날 헛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니터 속의 숫자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았고, 키보드가 피아노처럼 보였다. 일주일째 극한의 상황이 몰아치자 몸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어지럽고, 집중이 안 되고,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고,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그래도 나는 무시했다. 멈추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아서.
자반증 리턴즈
어느 날 아침, 샤워를 하다 팔에서 낯익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내게 고통을 가져다주었던 바로 그 빨간 점들.
“어? 이거…”
처음에는 모기에 물린 줄 알았다. 문지르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문질러도 없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악화될 뿐이었다.
“또 너냐, 자반증.”
대학 시절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다만, 이번에는 증상이 훨씬 심했다. 전에는 조용한 손님이었던 자반증이 이번에는 시끄러운 불청객으로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당시 내 몸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구토, 어지럼증이 또다시 나를 괴롭혔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기 싫어서였다. 병원에 가면 또 “쉬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게 뻔했으니까. 나는 그 말이 무서웠다.
동료들도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몸에 뭐 난 거 아니야?”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아니야, 그냥 피부가 좀 예민해진 것 같아”라고 둘러댔다.
목숨과 맞바꾼 킥오프
결국 다가온 운명의 날, 나는 킥오프 문서를 완벽하게 준비했다. PPT도 완벽, 기획안도 완벽. 내 몸 상태만 빼고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사건은 미팅 시작 10분 후에 벌어졌다.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 캠페인의 핵심 메시지는…”
바닥이 내 얼굴 쪽으로 다가온 것인지 내 얼굴이 바닥 쪽으로 다가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클라이언트들 앞에서 쪽을 당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에 있었고, 팔에는 수액이 꽂혀 있었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충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심각한 상태예요. “
“얼마나 쉬어야 해요?”
“최소 한 달은 완전히 쉬셔야 합니다.”
한 달? 나는 당황했다.
”그래도 저는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하고, 해야 할 일도 많고...... “
의사 선생님은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보셨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나요?”
목숨이라, 나는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았다.
입원하는 동안 나는 천장만 보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왜 내 몸이 주는 신호를 무시할까?
너는 누구냐
퇴원 날 무심코 본 거울 속 나는 2주 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얼굴은 부어있었지만, 눈빛은 맑아져 있었다.
그때 결심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내 인생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언제 휴식할 지도 내가 정하고, 수입도 내가 정해야겠다고. 더 이상 건강을 포기하며 남의 일정에 나를 끼워 맞출 수는 없었다.
병원을 나오는 날 나는 다짐했다. 이제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고. 더 이상 자반증한테 문안 인사를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앞으로 누가 “2주 안에 가능해요? “라고 물으면 “아니요, 불가능해요”라고 당당히 말하겠다고.
그리고 자반증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빌어먹을 자반증아,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