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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싫어서 회사를 차렸다

by 량과장

퇴원 후 나는 B2B 마케팅 대행사로 이직하기로 했다. 연봉이 기존 대비 300만 원이나 깎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워라밸이 먼저라고 생각했으니까.


면접 자리에서 대표님과 본부장님은 마치 워라밸 전도사인양 말씀하셨다.


“야근? 거의 없습니다. 6시 되면 다 집에 가요.”


나는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워라밸’은 오직 임원진만을 위한 워라밸이었다.



또, 새벽 2시


나는 입사 첫날부터 싸함을 느꼈다. 대표님은 정확히 6시에 “먼저 갈게요, 수고하세요! “를 외쳤다. 본부장님도 마찬가지.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라, 6시 되면 다 집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새벽 1-2시에 퇴근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또, 또, 또 사무실의 마지막 전등을 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6시에 “일찍 가세요! “를 외치며 먼저 퇴근하는 상사들을 보면 일찍 가라는 것인지, 늦게 가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매일 밤 택시 안에서 중얼거렸다.

“아, 워라밸이 이런 건가? 일은 내가 하고 밸런스는 다른 사람이 챙기는 것이 워라밸인가?”



출구전략


입사 3개월째 되던 날, 나는 결심했다. 진짜 워라밸이 있는 대행사를 만들어보자고.


열정이 앞섰던 나는 사업자등록신청을 했다. 수영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 물에 뛰어든 격이었다.



침묵의 2개월


성공적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은 후에는 명함을 만들어 여기저기 뿌렸다.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콜드메일도 뿌려봤지만 첫 2개월은 고요했다.


혹시라도 놓친 문의가 있나 싶어서 5분에 한 번씩 받은 메일함을 새로고침했지만, 광고 메일과 카드 대금 청구서로 가득했다.


“내가 너무 긍정적으로만 생각했던 걸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돼 가냐고 물었고 나는 “곧 잘 되겠지”라고 답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불안한 마음에 나는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눈에 불을 켜고 영업할 만한 업체를 찾아 헤매고, 밤이 되면 블로그를 작성했다.


시간이 남으면 휴대폰으로 사업 관련 유튜브를 봤다. “창업 첫 해에 매출 1억 달성한 비결”, “대행사 운영 노하우” 같은 영상들. 법률 블로그 콘텐츠를 작성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현실이 야속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회사가 싫어 회사를 떠났으니까.



기적의 첫 계약


맨땅의 헤딩을 3개월 동안 하자 내게도 기적 같은 일이 찾아왔다. 과거 클라이언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규모는 작았지만, 내게는 단비 같은 첫 계약이었다.


첫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클라이언트도 만족했고, 무엇보다 나는 처음으로 야근 없이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그 이후로는 신기하게도 일이 물밀듯 들어왔다. 입소문이 났는지 문의가 줄을 이었다.


첫 해 매출 목표는 5천만 원이었는데, 나는 5개월 만에 목표치를 달성했다. 클라이언트들이 만족하니 재계약률도 80%를 넘었다.



성인군자


이후 나는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광고주와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내가 전담했다. 디자이너나 기획자가 클라이언트의 갑질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했다. 모든 피드백은 내가 1차 필터링해서 전달했고, 무리한 요구사항은 내가 협상해서 합리적인 수준으로 조정했다.


구성원 개개인의 업무 성향과 집중력 패턴을 분석해서 개인별 맞춤 스케줄을 짰다. 아침형 인간은 오전에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을, 저녁형 인간은 오후에 집중력을 요하는 업무를 배치했다.


매주 월요일에는 팀원들과 개별 면담을 진행해서 업무량을 체크했다. 누군가 과로 징후를 보이면 즉시 업무를 재배분했다.


구성원이 아플 때면 “쉬어야죠, 건강이 최우선이에요”라고 답했고, 가족 행사가 있을 때면 “가족이 더 중요하죠”라고 답했다. 데이트가 있다고? “사랑도 소중하죠.”


그 결과, 모든 일은 내게 돌아왔다. 정작 내 워라밸은 망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 인플레이션


더 황당한 것은 구성원들의 반응이었다. 처음에는 “대표님이 최고예요”라고 반응했던 직원들도 배려에 무감각해졌다.


“사장님, 저 내일 또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왜요?”

“데이트가 있어서요.”


감사 표현은 점점 줄어들고, 요구사항은 점점 늘어났다. 나는 직원들의 편의를 봐주는 자판기가 된 기분이었다.



1인 대행사로 회귀


결국 나는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모든 업무를 혼자 해보기로 한 것이다. 홀로 기획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운영도 했다. 팀전을 홀로 하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 3-4개 정도는 직장 생활을 할 때도 거뜬히 해냈으니까.


그러나, 일이 늘어날수록 한계가 명확히 보였다. 클라이언트사가 10개가 넘으니 잠을 2~3시간씩 자도 업무를 끝낼 수가 없었다. 담당 브랜드가 15개가 되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아, 이래서 팀이 필요한 건가?”



프리랜서 고용하기


이번에는 프리랜서들을 써보기로 했다. 정직원보다는 부담이 적고, 프로젝트별로 관리할 수 있어서 효율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현실은 달랐다. 프리랜서에 따라 작업 스타일이 달랐고, 퀄리티도 천차만별이었다. 더 큰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에 소요되는 비용에 있었다. 매번 새로운 사람에게 프로젝트에 대해 브리핑하고, 작업물을 수정하고, 예산을 관리하려다 보니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나는 깨달았다. 프리랜서든 정직원이든, 사람 관리는 똑같이 힘들다는 것을.



6개월 만에 깨달은 것


6개월 만에 나는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배웠다. 모든 걸 다 해주는 자비로운 대표가 되기보다는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 모든 일을 겪은 나는 더 이상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지 않기로 했다.


독고다이를 택하는 대신 나와 함께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찾기로 했다. 내가 편의를 봐주는 것에 감사할 줄 알고, 함께 회사를 키워나갈 의지가 있는 사람들 말이다. 초심으로 돌아와 나 자신의 워라밸도 지키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는 비공식 슬로건이 생겼다.

“니어사이드는 모두의 워라밸을 추구합니다. 당연히 대표도 포함.”


여전히 아무도 대표의 워라밸은 신경 써주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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