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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두 번 죽인 서울

by 량과장

상경한 나는 프리랜서 여행지 기자가 되었다. 타이틀은 거창했다. ‘프리랜서’라는 단어가 주는 자유로움과 ‘기자’라는 타이틀이 챙겨주는 체면. 그러나 현실은 참혹했다. 한편당 1만 8천, 매일 3편을 쓰면 135만 원. 그나마도 매일 3편을 쓸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버틴 나날들


135만 원에서 집값으로 60만 원이 나가고 나면 75만 원이 남았다. 거기에 통신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그 적은 돈으로 한 달을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막막한 일인지 당해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독립하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쳤는데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매 끼니를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때우는 한이 있어도 버티는 것, 그것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물론,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내게도 컵라면과 삼각김밥이 물리는 시기가 찾아왔고 그때서야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그 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수십 개의 회사에 지원했지만 내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자금 사정에 계속되는 거절까지. 서울이 나를 두 번이나 죽였다.



자발적 감금


마케터로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포트폴리오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포트폴리오에 내가 써먹을 수 있었던 실적이라고는 그간 작성했던 네이버 포스트 게시글과 기사 몇 편 뿐이었고 내가 가진 하찮은 성과로는 마케터가 되기 어려웠다. 아무리 이력서를 넣어도 내 휴대폰은 울리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지는 않았다. 아니, 좌절할 여유도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해야 했으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스스로를 가택연금시켰다. 한 달간 오직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갈아엎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편의점 외출은 허용, 그 외 일절 금지. 감옥 같았지만 월세는 스스로 냈다.



무작정 따라 하기의 딜레마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포트폴리오에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 어떤 형식을 따라야 하는지 그야말로 일자무식이었다. 유튜브에서 포트폴리오 만드는 방법을 검색해서 단계별로 따라 해 봤지만, 남의 것을 그대로 베끼는 것 같아 찜찜했다.


그래서 결국 내 식대로 접근해 보기로 했다. 나는 무작정 핀터레스트에서 포트폴리오를 검색해 100개의 이미지를 수집했다. 포켓몬을 모은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수집하는 것은 예시였고, 훨씬 절망적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것이 바로 레퍼런스 수집 과정이었다.



포트폴리오 해부학


수많은 레퍼런스들을 살펴보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포트폴리오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굉장히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수행해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범용 포트폴리오를 만들기로 했다.


업무 분야를 카테고리별로 나누고 콘텐츠 마케팅 파트에는 내가 썼던 네이버 메인 기사들의 스크린샷과 디자인 작업물들을 넣었다. 퍼포먼스 마케팅 파트에는 호주에서 돌린 메타광고와 GDN의 예시를 넣고 싶었지만, 성과를 캡처해 두지 않았던 관계로 일주일간 모의 A/B 테스트를 진행한 후 그 결과를 넣었다. 제휴 마케팅 파트에는 수산회사에서 제안서를 작성해 프랜차이즈 업체와 가계약을 맺은 사례를 포함했다.


고치고 또 고치고, 다듬고 또 다듬어서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포트폴리오가 완성된 당일, 나는 50군데에 이력서를 뿌렸다.



또 다른 시작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면접 연락이 왔다. 한 달간의 자발적 고립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취직에 목말랐던 나는 처음 면접을 본 회사에 가기로 결정했다. 다른 곳에서도 연락이 오고는 있었으나 당장 편해질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회사 규모는 작았지만 상관없었다. 삼각김밥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지하실에서 일해도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하보다 더 깊은 곳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그저 135만 원으로 연명하던 지옥에서 드디어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찰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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