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7월 칼럼은 이정문화백이 1965년에 그렸던 미래만화를 모티브 삼아 평소 생각을 담아봤다.
'오래된 미래'는 워낙에 유명한 문구인데 '다가올 과거'는 그에 조응하는 차원에서 직접 만들어본 조어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2110020003581
- 다시 펴본 1965년 공상만화
- 속도만큼 중요한 변화의 방향
- AI시대에 맞는 사회계약 필요
1965년, 이정문 화백은 2000년대를 상상한 그림 한 장을 그렸다. 소형TV전화기와 전기차, 태양열 주택 등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대부분 우리 일상이 되었다. '오래된 미래'의 상징적인 예시다.
소설가 윌리엄 깁슨의 말처럼,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이미 도착한 미래는 희망과 함께 기존 질서를 흔드는 불안을 안긴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접어든 거대한 전환점 앞에서 우리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 '오래된 미래'를 어떻게 맞이할지에 따라 우리 모습이 결정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낡은 과거의 틀에 머무르다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반대편, '다가올 과거'에 빠지는 셈이다.
다른 하나는 기술의 힘을 맹신하며 무분별하게 내달리는 것이다. 이는 일자리 불안과 윤리적 혼란, 사회적 소외를 야기할 것이다. 단순히 저임금 일자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변호사와 회계사처럼 반복적인 고숙련 직무가 먼저 위협받을 거란 분석도 나온다. 공동체의 질서를 뿌리부터 흔드는 또 다른 형태의 위협이다. 영국 정부는 구글 아마존 등과 함께 750만 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AI 기술교육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다가올 과거'를 피해야 한다는 말이 낡은 것을 전부 버리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지켜온 가치를 새로운 기술과 조화시키려는 성찰의 과정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지혜라는 '나침반'으로 새로운 시대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일이다.
자율주행차를 보자. 미국에선 구글 웨이모와 테슬라 로보택시가 이미 일상을 달린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 9월, 서울 강남에서 심야 자율주행 택시가 시범 운행을 시작했다. '오래된 미래'는 우리 문 앞에 와 있다.
이제 우리의 선택이 미래를 가른다. 기존 택시 면허 체계만으로 이 새로운 서비스를 재단한다면, 혁신의 싹을 꺾어 '다가올 과거'를 자초할 수 있다. 반대로 안전과 책임에 대한 사회적 약속 없이 섣부른 상용화만 외치는 건 무모한 질주다. 보행자를 살리기 위해 운전자를 희생시킬 수도 있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우리 사회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속도만큼 중요한 것이 방향이다. 기술의 속도를 그저 따라가기보다 우리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이끄는 지혜가 필요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6년 퇴임 무렵, MIT 미디어랩 소장과 AI 등 신기술을 주제로 나눈 대담 속 통찰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는 신기술을 막기보다 촉진해야 한다면서도, 중요한 전제를 달았다. 정부와 사회가 연구에 함께 참여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결국 '돈을 내는 사람', 즉 거대 기업이 기술의 방향과 가치를 결정할 거라고 경고했다.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사회 계약'을 요구한다. AI가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경제적 효율 너머의 가치를 물어야 한다. 돌봄과 교육, 예술처럼 우리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역할의 가치를 재고할 때다. 오바마의 말처럼,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완벽함이 아닌 '꼬임(kinks)', 즉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극복해가는 모습일지 모른다. 과거의 지혜 위에서 인간의 가치를 성찰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열어야 한다. 그것이 '오래된 미래'를 진정한 진보로 만들고, '다가올 과거'의 우를 피하는 길이다.
#참고로, 이정문 화백이 2014년, 2050년을 예상하며 그린 그림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