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상승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솜이는 모량이 풍부한 편이다. 비숑은 털의 양이 몸값에 영향을 미친다. 보송보송하고 빡빡한 털을 잘 빗겨 동그란 헬멧을 쓴 머리(일명 하이바 스타일)에 곰돌이 인형 같은 부드러운 몸이 비숑을 비숑답게 해주는 것이다. 털을 뒤집어쓰고 산다는 건 참 불편할 것 같지만 그래도 이렇게 쌀쌀한 날씨가 시작되면 야외 활동에 제격이다. 기본적으로 후리스 하나는 든든하게 걸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제 후리스로는 안 되는 날씨가 오고 말았다.
오늘 드디어 처음으로 옷을 입었다.
다른 반려견들은 종종 하의 실종된 채 티셔츠만 입히기도 하던데, 솜이는 원체 갑갑한 걸 싫어해서 그런 건 입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기 몸을 통제하는 하네스(목줄)까지도 물어뜯는 무시무시한 괴물이기 때문에. 그러니 이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힌다는 게 얼마나 큰 모험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너무 딱 맞다. 하긴 좀 여유가 있으면 목줄로 리드할 때 옷이 겉돌 테니, 꼭 맞는 편이 낫다. 옷 입혀 놓으니 마냥 곰돌이 같던 솜이가 동네 노는 오빠 같다. 자, 이제 산책 출발!
그런데, 녀석이 한 발짝도 떼지 않는다.
간신히 목줄로 리드하는데, 이건 소리만 안 날 뿐이지, 삐그덕 삐그덕, 윙 치키 윙 치키, 로봇이 움직이는 것 같다. 왜 이렇게 어색한 걸까? 옷에 감싸인 솜이는 뭔가에 심각하게 통제를 받고 다리에 마비가 온 것 같이 맹해졌다. 아무리 불러봐도, 목줄을 당겨봐도, 발이 땅에 붙어버렸다. 그러더니 겨우 한 발짝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왜 왼쪽으로만 걷는 건데? 몸이 한쪽으로 쏠린 느낌. 왼쪽은 많이 움직이지 않고 오른쪽만 성큼 움직여서 반원을 그리듯 비틀거리며 걷는다. 옷이 어딘가 끼였나? 다시 살펴봐도 이상은 없는데, 이 아이가 옷을 처음 입고는 너무 의식해버렸다. 뭔지 모르게 가여워져서 그냥 냉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정작 자기 구역에 들어서자 달라진다.
잠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주변 나무뿌리와 화단 냄새에 집중하기 시작하더니 옷을 잠시 잊고 자기 본분에 충실해졌다. 그러다 구역을 떠나 이동할라치면 또 다리가 고장. 자기도 모르게 마킹할 땐 또 자연스럽다가, 길 한복판을 활보해야 할 때엔 다시 오작동. 아직은 딱 내 옷 같지 않은 거구나. 찬찬히 익숙해지겠지. 그래도 칼바람이 털을 헤집고 몰아닥쳐서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보다는 나으니, 조금씩 옷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미 사랑한다.
내게 입혀준 순간, 아, 이런 느낌이구나, 했다. 나는 주인이 내게 입혀준 이 옷이 참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다만 조금 어색할 뿐이다. 아무것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 똥강아지로 살다가, 이렇게 따뜻한 옷을 입고 보니 그간 얼마나 내가 제멋대로였는지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주인이 오라고 해도 안 오고, 가자고 해도 안 갔다. 내 맘대로 안 되면 줄을 물어뜯고, 아무 데나 드러누워 등을 비비며 아무렇게나 놀았다. 그게 자유라며 좋아했는데, 옷을 입어보니 옷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몸에 딱 맞아서 그냥 이게 뭔가 싶어 못 움직인 것뿐, 낮게 부는 이 차가운 바람 속에 더 나를 당당하게 하는 옷의 온기를 이미 사랑하고 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