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남의 식물 03
다음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반갑지 않은 봄비에 꽃잎이 많이 떨어져 버렸다. 빗물이 덜 마른 교정에 기온도 인구 밀도도 좀 낮아졌다. 가르마 끝으로 뚝뚝 일액을 흘리던 지호가 오늘 괜히 나를 어색해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교무실을 나섰다. 살짝 바람이 쌀랑한데, 지호는 운동장 스탠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사실은 내가 어색할까 봐 걱정이다. 아버지한테서 맞았다는 말을 하는 표정이 주는 느낌. 그냥 한번 어쩌다 맞은 게 아닌 것 같은 느낌. 눈썹 위가 빨갛게 찢어진 것 같이 부풀도록, 얼굴을 맞았다는 사실이 주는 느낌. 고2 남자애가 그런 말을 하고 울음을 놓는 그 느낌들이 왠지 내가 감당할 사이즈는 아닐 것만 같다는 느낌으로 확 뭉쳐서 몰려왔기 때문에.
"오늘도 땡땡이?"
"......"
"꽃 다 진다, 정말."
"......"
"나도 맞아본 적 있어. 어린이날이었는데, 나는 무슨 선물 사달라고 할까, 행복한 고민에 잠겼거든. 근데 엄마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바이올린 켜고 피아노 치는 아이가 나란히 붙어있는 조각상을 사 왔어. 선물이라며 내 피아노 위에 올려놓으시는데, 순간 너무 화가 난 거야. 왜 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내 선물로 자기 기분을 내는 거야? 그걸 집어다가 바닥에 내던져서 깨뜨렸지."
"맞을 짓 하셨네요."
"아빠한테 진짜 많이 맞았어. 잘못했다고 해도 계속 때리더라. 난 선물도 잃고 맞기만 하고, 최악의 어린이날이었지."
"최악... 뭐가 최악인지... 매일 오늘이 최악일까, 그런 생각해요."
"......"
"이유가 없어요, 난. 그냥 맞아요. 나도 뭘 확 집어던져 버릴까, 그럼 억울하지 않으려나?"
"그냥 다짜고짜 때리신다고?"
"이유가 어디 있어요? 그냥 매일 맞아요."
"엄마는 뭐 하시고? 너 맞을 때 아무도 없어?"
"엄마도 맞고. 울고 있고. 그만하라고 하면 나도 맞고."
"다른 가족들은?"
"형이 둘이 있는데, 형들은 이제 안 때려요. 형들이 들이받았거든요. 또 때리면 죽이겠다고. 그랬더니 형들은 안 때려요."
"너 맞을 때 형들이 안 말려줘?"
"다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이어폰 꽂고 있는 거죠."
"헐, 동생이 맞는데 그냥 그러고 있어? 도와달라고 하지."
"나서면 큰 싸움 나고, 진짜 형들이 아빠 죽일까 봐 무서워서 아무 소리도 안 내고 그냥 맞아요."
"말도 안 돼. 형들도 나빴네. 아빠는 왜 그러시는데?"
"몰라요. 맨날 엄마가 도망갈지도 모른다며 때려요. 그냥 엄마가 진짜로 도망가면 좋겠어요."
"엄마도 힘드시겠다. 아빠가 일은 하시니?"
"네. 낮에는 일하러 나가고 안 계세요. 전에는 엄마도 일했는데, 아빠가 하도 나가지 말라고 해서 그냥 집에 있어요. 낮에 엄마가 집에 계시다가 동네에서 개 한 마리를 얻어다 키우기 시작했는데, 진짜 귀여웠거든요. 엄마도 그 개 때문에 전에 없이 웃기도 하시고. 그런데 아빠가 때려죽였어요. 개가 맞아 죽는 거 본 적 있어요? 저는......"
"하아~아이고... 네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마치 내가 그 장면을 같이 보고 있는 것 같은 격노와 슬픔에 압도되어 눈물이 맺혔다. 어디 기댈 데도 없는 이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그냥 지금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그저 같은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다 미안하다.
"그때 증오심을 배웠어요. 형들이 안 죽이면 내가 죽여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게 그때였어요."
"하이고... 애가 보는데... 하아..."
내 목소리가 눈물에 구겨졌다. 내가 먼저 이런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이 녀석이 괜히 내가 어설프게 동정하는 것 같이 느끼면 안 되는데.
"각목으로..... 지금도 악몽 꿔요."
말 끝에 지호도 또 눈물이 맺혔다.
그 무렵부터였다.
알로카시아가 동물에게 관심을 끊은 건. 그리고 그냥 식물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적어도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죽음을 보더라도 슬퍼할 만큼 정 붙이지 않아도 되어서. 늘 그대로 있어줘서. 조용히 그늘이 되어 줘서. 다시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정을 붙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무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다. 이제는 엄마가 맞는 걸 봐도 무감각해진 것 같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다 끔찍하다.
사랑? 아무 힘도 없는 그깟 사랑?
혐오한다. 사랑을, 사람을, 세상을, 모조리 다. 사랑한다면서 때리는 걸 권리처럼 여기는 아빠, 병신 같이 맞기만 하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엄마, 미친 사랑, 엄마의 나를 향한 무기력한 사랑을 저주한다. 책임지지도 못할 지긋지긋한 사랑, 지켜주지도 못할 거면서 나는 그 개를 사랑했다. 사랑은 아무 힘이 없다. 사랑은 '살아'의 다른 말. 그냥 살아야만 하는, 살아내야만 하는 끔찍한 지옥의 다른 말. 맞다가 마지막으로 마주친 개의 눈빛이 지금까지도 나를 더 미치게 한다. 미친놈,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그 새끼 죽여버리고 나도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수도 없이 가슴을 치며 울다가 그대로 증오를 알아버렸다. 사랑은 모른다. 그래도 증오만큼은, 순간 치솟아 온 몸을 전류처럼 감아 흐르는 분노만큼은,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공포와 저주만큼은, 나를 따라올 자가 없을 거라고 자부한다.
이게 사람 사는 꼴인가 싶다.
개 생각이 나서 그런 건지, 증오심이 넘쳐나서 그런 건지, 온몸을 문득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흘린다. 18세 남자애가 이렇게 떨면서 울다니, 저 마음 뭘까?
"나를 저렇게 죽이겠구나, 했어요."
이 집 아버지는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맞지 말고, 아버지 상태가 이상하다 싶을 땐 그냥 뛰쳐나가. 아무리 춥고 비 와도 밖으로 나가서 잠시 피해있도록 해."
"몇 번 그렇게 해봤는데, 그러고 돌아오면 엄마가 초주검 되어 있어서..."
"하아... 정말 심각한 가정폭력이구나. 네가 정말 많이 힘들었겠다."
이건 그냥 신고해야 한다. 내가 할 일은 정해졌다.
"내가 너랑 이렇게 땡땡이치고 앉아서 듣고 끝나면 너는 달라지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하시게요?"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아빠 찾아가시게요?"
"그럼 안 돼?"
"쌤, 전에 제가 한번 신고한 적 있어요. 엄마가 죽도록 맞고 있어서요. 경찰이 왔는데 그때뿐이에요."
"그래도,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도움이야. 내가 뭐라도 할 수 있게 해 줘."
"쌤, 내가 더 많이 맞게 되는 건 아니겠죠?"
"걱정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겁내지 마, 지금이 최악이야. 더 나빠질 일은 없어."
부은 눈썹을 찡그리며 알로카시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식물은 늘 그 자리에 있지. 붙박이인 것 같아도 해와 비의 사랑을 받고 있지. 책임지는 사랑 속에 버티고 있지. 그렇게 받은 사랑으로 네게 그늘을 내어주는 거겠지. 꽃잎이 다 떨어져도 벚꽃 나무는 그대로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아무 색깔도 없이 존재만으로 그냥 좀 앉았다 일어날 그런 그늘, 오늘도 이곳에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