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남의 식물 02
다음날 점심시간 내가 있을 곳은 정해졌다.
내 커피만 홀짝대기 왠지 미안해서 막대 사탕 하나 챙겨 들고 나왔다. 한참 앉아있다 보니 저쪽 교문 근처에 멀대 같은 알로카시아 잎사귀가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면서 알로카시아가 나를 바라보았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들고 있던 사탕은 어느새 옆에 와서 재잘거리는 아이 손에 넘어갔다. 오늘은 아닌가 보다. 어쩌면 이런 시간을 며칠 더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다음 날에도 커피를 들고 꽃그늘에 들어갔다.
어느새 또 몇몇이 두리번거리며 다가왔다. 며칠 전부터 점심시간에 종종 내게 얼굴을 내미는 민지는 여기까지 따라 나와 아예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운동장으로 흐르는 음악소리에 유난히 에코가 좀 심하다. 아이들은 내 폰에서 멜론을 꺼내어 자기들이 듣고 싶은 음악으로 에코를 덮고 싶어 했으나 내 귀엔 모든 게 소음처럼 들렸다. 지호는 오늘도 무심히 나를 한번 쓱 보고는 벚꽃과 건물 사이로 난 작은 길을 걸어 사라졌다.
다음날은 비가 내렸다.
망했다. 비가 오고 나면 꽃이 다 떨어진다. 꽃비는 어제가 끝이었나. 오늘은 앉아있을 수가 없겠구나. 그래도 선도부는 우산 쓰고 돌아다니겠지? 녀석 이야기를 들어야 쓰겄는디, 어찌할꼬 고민하며 교무실 안쪽 상담실에서 점심 도시락으로 싸온 샐러드를 심드렁하게 씹고 있었다. 적상추 조각에서 씁쓸한 맛이 났다.
"쌤, 진짜 식물 좋아하시네요."
이 타이밍에 불쑥? 저 녀석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더니, 이제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있나. 어떻게 알고 제 발로 왔지?
"이거? 음, 오늘은 별로 맛이 없다."
먹던 도시락 뚜껑을 닫는 사이, 지호는 상담실 문을 닫았다.
"비 온다."
"늘 그렇죠."
"어젠 안 왔어."
"항상 와요."
"뭐래? 야, 너랑 말하기 힘들어."
"네. 상상 불가라."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 밥은 먹었니?"
"네. 일찍 먹잖아요."
"순찰은 안 가?"
"주 2회는 안 가요, 원래. 그냥 제가 심심해서 다니는 거지."
"그게 오늘이야?"
"당분간 매일일 수도 있고요."
"그래도 되나? 진짜 땡땡이 날라리 맞네."
"선배들한테 말해뒀어요."
"왜 안 가?"
".... 나무 보러 다니려고요."
선문답에 능한 아이. 말귀 다 알아듣고. 뭘 상상하고 실패했기에 어른 같은 말투로 어른 같이 말할까?
"알로카시아 좀 찾아봤어요."
"그래? 내가 너 닮았다고 해서 기분 구렸어?"
"그런 건 아니고요."
"찾아보니 뭐래?"
"알로카시아 같이 잎이 넓은 애들은 종종 눈물을 흘려요."
"걔네 수분이 많으면 잎으로 배출하는 거잖아. 나도 키워봐서 알아."
"맞아요. 그걸 일액 현상이라고 한대요."
"그렇구나. 식물 박사네."
희미하게 웃으면서 살짝 얼굴을 찡그린다.
"근데, 너 눈썹 위에 거긴 왜 그래?"
"......"
"순찰 돌다 맞았냐? 선도부 건드리면 가중처벌인데. 멀건 얼굴에 그게 뭐야?"
".... 맞았어요. 집에서."
"집에서? 누가 때려? 언제? 왜?"
"쌤, 진정하세요. 그냥 맞았어요. 아버지한테."
뎅. 머리가 흔들린다. 나도 한 대 맞은 것 같다. 너무 표정 관리가 안 되면 곤란한데, 순간 얼음이 되었다.
일단 이럴 땐 커피를 마셔야 한다.
카페인 긴급 수혈, 생각이 순간 와르르 쏟아질 땐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숨 고르기는 필요한 법이다. 나 커피 좀, 잠시만, 하고 자리를 뜨긴 했는데, 또 너무 놀란 티를 낸 건 아닌가 싶어 괜히 미안해진다. 서둘러 커피랑 코코아랑 들고 들어갔는데, 알로카시아에 일액 현상이 생기고 있다.
"뭐야, 윤지호, 많이 아파?"
"......"
"어디, 좀 봐."
도리어 고개를 푹 숙여 정수리밖에 안 보인다. 반듯한 가르마가 잎맥 같이 흐른다. 그 아래로 이 인간 식물에서는 넘쳐나는 감정이 물방울이 되어 뚝뚝 배출되는 중이다. 나도 어딘가 아픈 것 같다. 빗소리가 더 선명해진다.
"에휴, 오늘 비가 많이 오네."
"......"
"이노무 비가."
"......"
습도가 높아서, 알로카시아가 힘들겠다. 이번엔 내 커피뿐만 아니라 지호의 코코아도 나란히 다 식어버렸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울음만 놓고 가버린 아이.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제 공간적 배경은 대략 상상 가능하다. 사건 발생 현장은 집이라 이거지. 궁금하지만 아무것도 뒤져보지 말자. 가족 관계라든가, 부모님 직업이라든가. 자꾸 내 선입견으로 엉뚱한 그림을 그리는 건 옳지 않다. 네 잎사귀 펼쳐 보이는 만큼만 상상할게. 내일도 꼭 보자. 벚꽃이 다 지기 전에.
<제목 이미지: 네이버 '가든&헬스 프렌즈'블로그에서 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