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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Apr 20.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26

식물남의 식물 01

큰 키에 비해 아직 덜 익은 동그란 얼굴.

몬스테라나 알로카시아 같은 식물의 길쭉한 줄기에 둥글넓적한 잎사귀처럼. 그래서 묘하게 더 도드라지는 식물성 인간, 윤지호. 4교시 마치기 5분 전엔 그 어떤 진지한 이야기에도 아랑곳없이 손을 번쩍 들고, 눈으로 사인을 보내며 어깨를 움츠리고 슬쩍 자리를 나가 합법적으로 전교생 중에서 제일 먼저 식사를 하는 아이. 점심시간에 교내 어딜 돌아다니든 항상 마주치는 아이. 이른 식사를 마치고 보이지 않는 '선도부' 완장을 두른 채, 월담하는 아이들, 구석진 곳에서 흡연하는 아이들을 두루 '현장 접수'하며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학생부에 들러 신고하고 가는 아이. 멀뚱한 키에 그 동그란 얼굴을 360도로 빙글빙글 돌리는 것 같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디펜스, 아니 어태크. 무표정한 눈매, 건조한 말투로, '학번 불러주세요.'라든가, '이미 사진은 찍었으니 발뺌하지 마시죠.'라고, 서열 몇 위라든가 학년 따위 가리지 않고 덤비는 꿋꿋하고 무식한 아이.



학생부는 사실 그 아이 덕을 많이 봤다.

그 아이를 포함하여 충성스러운 선도부의 덕을 많이 봤다. 물론 자체 정화의 의미로, 또 봉사활동의 의미로, 학생 자치의 의미로, 이 학교에서는 '선도부'가 최고 권위를 부여받는다. 일짱의 권위는 아래로부터 주어진다면, 선도부의 권위는 위로부터 주어진다. 따라서 일짱에게는 비합법적으로 굴복하고 선도부에게는 합법적으로 굴복해야 한다. 물론 순간 몸에 밴 습성대로 도망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 학교 곳곳에 CCTV가 깔려있기에 소용없다는 걸 그들은 곧 깨닫는다. 간단한 인상착의와 시간 장소만 분명하면 거의 100% 그들을 검거(?)한다. 따라서 멀리서 선도부 얼굴만 보여도 그냥 알아서들 흩어진다. 선도부는 언제든 범행 순간을 덮치기 위해 정말 많이 머리를 써서 새로운 코스를 짠다. 어떤 날은 후문에서 시작하고 어떤 날은 체육관에서 시작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한결같이 그 시간 그들은 교내 어딘가를 순찰하고 있다. 지호는 그들 중 하나이다.



삭막한 이 학교에도 벌써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커피 한 잔 들고 산책을 나간다. 선생님들과 산책하고 싶을 땐 후문을 슬쩍 열고 뒷산 입구 앞을 서성이기도 하지만 혼자 광합성이라도 하고 싶을 땐 잠시 후관 현관문만 나서도 좋다. 이미 벚꽃 주변은 아이들로 북적거린다. 폰을 제출해서 지금 당장 사진을 찍지는 못하지만, 서로 손가락 액자를 만들어 인생 샷 사이즈를 가늠하며 포토존을 만들고 있다. 선생님을 졸라 폰을 잠시 돌려받은 아이들도 보인다. 어디 만만한 데가 없나. 좀 조용하게 꽃비 맞을 만한 데가. 그러다 운동장 쪽 스탠드에 앉아 있는 지호 뒤통수를 발견했다. 이 시간에 여기 한가롭게 앉아 있을 아이가 아닌데, 뭘까, 하고 선도부 족치는 소리부터 던져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답 없이 섬찟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앞머리로 가려진 한쪽 눈썹이 살짝 부은 것 같다.

"뭘 놀라고 이러시나? 순찰 안 돌고 여기서 뭐 하냐?"

"그냥 좀 앉아 있어요."

"선도부, 순 땡땡이 날라리구먼. 너도 꽃타령 중이니?"

"맞아요. 저 꽃 좋아해요."

어머나, 감정도 없이 길쭉하게 그저 식물남같이 생겨갖곤, 꽃이 좋단다. 센 친구들, 형들 따라다니며 악착같이 학번 이름 적고 다니는 무식 용감한 선도부가 야리야리하게 꽃 좋다는 소리를 하다니, 뭔가 언밸런스라고 해야 하나?

"의외네. 하긴 우리나라에서 벚꽃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일본 꽃이네 어쩌네 해도 이렇게 꽃그늘에 앉아 보면 헤벌쭉하는 건 사실이지. 와, 여기서 보니 제대로다."

"전 나무가 좋아요. 꽃이랑 나무랑, 이런 게 좋아요."

"오, 그렇구나. 근데 너 그거 알아? 생긴 게 잎사귀 큰 식물 닮았어. 알로카시아 알아?"

"쌤, 알거든요. 제가 머리가 크다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도 식물 좋아해. 꽃이랑 나무랑 풀이랑, 음, 샐러드랑, 김치랑, 피클이랑... 음, 식물은 다 좋아."

"김치요?... 참나, 쌤 카테고리는 참 희한하네요."

"헤헷, 난 먹을 수 있으면 다 좋아. 못 먹는 건 만져도 좋고. 못 만지는 건 봐도 좋고. 못 보는 건 생각해도 좋고. 생각 못 하는 건 상상이라도 해도 좋고. 상상도 못 하는 건, 글쎄, 그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상도 못 하는 건... 죽으면 알게 되겠죠."

"어머, 얘, 갑자기 너무 심각하다. 뭘 또 그렇게까지."

"종종 생각해요. 상상도 못 하는 것에 관해서. 그래서 얼른 죽고 싶어요."

"어머머, 뭔데? 뭘 상상하다 실패하는데? 응? 죽고 싶을 만큼?"

"아니에요."

물끄러미 옆얼굴을 들여다보는데, 지호는 그걸 의식했는지 얼굴을 저쪽으로 살짝 돌린다. 부은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눈퉁이는 왜 저래? 그나저나 뭘 상상하기 힘들었을까? 뭘 상상하다 안 되어서 죽고 싶은 걸까? 이렇게 흩날리는 벚꽃 아래에서 이런 섬뜩한 대사라니, 정말 감정도 없는 식물남 같으니라고.

"나도 가끔 상상하기 어려울 때가 있거든."

"뭔데요?"

"나도 말 안 할래. 너도 말 안 하니까. 우리 둘 다 죽어서 알게 되기로 하자."

훗, 짧게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뱉는다.

"원래 현실에 없으면 상상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 나는 종종 현실에 없어서 상상으로만 만족할 때도 있는데. 사람마다 다르구나."

"선생님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수수께끼 투성이로다. 너랑 얘기하려면 점이라도 쳐야 하나 봐. 돗자리라도 깔고 쌀알이라도 뿌릴까?"

"쌤.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겠죠?"

"...... 나도 언제나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게."

이번에는 녀석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말귀를 알아들었으려나. 오늘은 선문답하기 딱 좋게 꽃비 내리는 날이니.

"오늘은 끝. 종 친다, 들어가자."

나는 먼저 벌떡 일어났다. 내 무릎 어깨 위로 떨어진 꽃잎이 후루룩 날린다. 아이는 무심히 그 꽃잎에 손을 뻗는다.



들고 있던 커피가 벌써 식었다.

들어선 복도에 문득 냉기가 감돈다. 너의 그 상상의 세계는 뭘까? 그래, 나는 몰라. 네가 죽고 싶은 이유를. 그래도 너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것들과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것들을 서로 상상해보기 위해서. 오늘부터 내가 네 벚꽃 나무가 되어 보려고. 내일 만나자, 지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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