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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Oct 06.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29

식물남의 식물 04

밤 11시,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

이 시간에 전화할 만큼 친밀하게 느끼는 걸까? 혹시나 해서 저장해 둔 윤지호의 전화, 혹시 사고라도 난 걸까? 심장이 급하게 뛰는 바람에 말도 급하게 나왔다.

"뭐야? 너 무슨 일 있어?"

"쌤, 무슨 전화를 이렇게 받아요."

"응, 그랬나? 근데 진짜 무슨 일이야?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뇨, 그냥 해봤어요. 끊으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받으셔서..."

"아, 좀 튕길 걸, 윤지호 이름 뜨니까 내가 너무 신나게 받아버렸네. 근데 아무 일 없는 거 맞지?"

"아휴, 쌤. 그냥 했어요."

"어디야?"

"집 앞이요."

"거기서 뭐해? 얼른 집에 안 들어가고?"

"꽃바람 쐬요. 그냥, 바람이 불어서."

"......"

"......"

"같이 쐬자."

"됐어요. 들어갈 거예요."

"정확히 어디야?"

"학교 앞 사거리요."




사거리 앞, 지호의 동그란 머리가 가로등 아래 쪼그리고 있다.

맨발에 슬리퍼, 아직은 밤바람 제법 쌀쌀한데 반팔, 반바지, 결정적으로 내가 나온 이유는 비가 오고 있어서.

"아직 안 들어갔네?"

"......"

"얼른 타, 멍충아, 비바람 몰아치는구먼."

이 녀석의 궁상은 어디까지인가? 왜 늦은 밤에 비를 맞으며 덜덜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는가?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얼굴을 하고, 너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너 이러고 있을 줄 뻔히 알았다고, 비바람 부는 밤에 멍충이 아니랄까 봐 꽃바람 쐰다는 뻥을 치고 이런 궁상 청승 혼자 다 뒤집어쓰고 있을 줄 알았다고, 이 멍충아.




차 안에 김이 서린다.

편의점 앞에 차를 대고 코코아를 사 왔다. 식물남의 물관에 코코아가 쪼로록 빨려 들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요즘 유난히 비가 자주 온다. 지겨운 빗물, 빗물, 빗물, 이 알로카시아 속에 따끈한 코코아만 가득 채워주고 싶다. 콧물을 훌쩍거리는 지호, 많이 춥겠다.

"집에 들어가, 이제."

"......"

"감기 걸린다. 살금살금, 그냥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이불 덮고 자라."

"지금은 안 돼요. 아직 아빠 안 잘 거예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렇게 빗물이 콧물이 되도록 방황했을까? 오늘 내게 전화한 건 얼마나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했을까? 세상의 어른들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미웠을까? 매일 맞아 죽는 강아지를 떠올리며, 홀로 조용히 안 맞아 죽을 궁리를 얼마나 많이 했을까?




"나, 신고했어. 내일 학교에서 만나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

"내일부터는 너한테 전화가 종종 갈 거야. 모르는 번호라도 일단 받아봐."

"네."

"나보다 훨씬 잘 도와주실 전문가분들이야. 나는 다리만 놓을 뿐이고."

"그런데 아빠 잡혀가요?"

"아니, 조사는 나올 텐데, 당장 잡혀가는 건 아닌 것 같고, 필요하면 격리 조치도 될 거래."

"네. 저 학교 다니는 건 문제없는 거죠?"

"물론이지. 네가 요청하면 보호받는 것, 상담받는 것, 필요하면 치료도 받는 것, 격리해서 안정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 뭐 다 그런 차원이지, 네 생활을 침해하거나 귀찮게 하려는 건 아니야. 걱정 마."

"네."

"용기를 내줘서 고맙다, 지호야."

"제가 고맙죠, 쌤."

"네게 의지만 있으면, 누구든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야."

"......"

"네게 그런 의지가 남아있는 것도 아주 기특한 일이고."

"죽고 싶어요, 의지는 개뿔, 매일매일, 맞아 죽지 않는 죽음을 생각해요."

"그래, 그래, 죽고 싶었을 거야. 애썼어. 살아남느라, 애썼다."

"죽이고 싶어요, 지금도 당장 쫓아가서 개 패듯 패서 죽이고 싶어요. 흐억, 흑."

말끝에 또 놓아버리는 설움이 와이퍼를 멈춘 차창으로 퍼붓는다. 하여간, 비가, 에휴.

"윤지호. 오늘 덕분에 꽃바람 잘 쐬고 간다. 내일부터는 네 인생에도 꽃이 필 거야. 응?"

"......"

울다 호흡이 거칠어진 지호. 내뱉는 숨결에 지나간 상처들이 흉터처럼 내려앉았구나. 숨 쉬는 것마저도 힘들다. 수도 없이 많은 날들을 이렇게 뛰쳐나왔겠지. 하룬들 편한 날이 있었겠니? 알로카시아, 네게 이젠 비가 그치면 좋겠다.




알로카시아는 다음날 상담실로 불려 갔다.

이후 상담 일정이 빠르게 잡혔다. 두 번의 상담이 더 이어진 뒤, 교육청 복지과에서 가정 방문이 진행되었다. 교내 상담실은 행정 업무만 처리해주고 지호의 상담은 외부 전문가가 진행하기로 했다. 오랜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에게도 같은 상담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후 어머니는 정신과의 체계적인 치료를 받기로 했다. 지호에게도 간간이 의사 선생님의 조언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불편하면 얼마든지 쉼터로 피신하여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쉼터에서 며칠 지내던 지호가 상담과 치료를 시작하기로 한 아버지의 결정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온 집안이 사실 다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마음을 많이 졸였다.

괜히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까 봐. 더 아프게 할까 봐. 행정과 현실 사이에 끼어 어정쩡하게 아무 짓도 못하게 될까 봐. 오히려 행정이 더 폭력이 될까 봐. 오죽했으면 아들이 제 손으로 아빠를 경찰에 신고해봤을까? 영양가 없는 후속 처치가 얼마나 큰 절망과 공포로 다가왔을까? 피해자의 인권보다 더욱 소중한 그들의 인권이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몽둥이찜질로 되돌아왔을까? 연약한 저항, 실패한 경험이 나에게도 공포가 되어 가정 폭력 피해 사실에 관한 보고를 학교장과 교육청에 올려 보내고도 내내 맘 졸이게 했다. 행정의 역습이 될까 봐.




상담받으러 다니는 동안 지호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냥 운동장을 훑어보면 어디선가 알로카시아가 동동 떠다니는 걸 볼 수 있다. 가끔은 꽃잎이 다 진 벚꽃 나무 아래에 앉아 있기도 하고, 종종 눈길이 부딪힐 때엔 고개를 살짝 숙일뿐이다. 저 녀석이 감히 날 쌩까? 내가 불편해졌나? 거리 조절하는 알로카시아의 무심함이 식물스럽지만 저렇게 건조하게라도 살아있으면 됐다. 나도 따로 부르거나 아는 척하지 않고 학교 상담 선생님께 지호 상담과 치료 상황에 대해 안부만 가끔 물어보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올봄 진로체험학습 장소를 '삼림학과'가 있는 국립대로 정했다. 식물남 윤지호가 식물에게라도 정을 더 잘 붙여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체험학습 계획서 1안에 들러리 2안, 3안을 붙여놓고 강력하게 밀었다. '진학 연계 프로그램'이라는 명목으로.




울창한 숲길이다.

캠퍼스 안에 이런 숲이 있어서 참 좋다. 진학에 관한 설명회를 열어주신 대학 입학처 관계자분들 덕분에 사심 가득했던 진로체험학습이 더 풍성해졌다. 설명회를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에게 캠퍼스 투어라도 다녀오라고 잠시 시간을 주었다. 이런 학교에 식물남이 와서 삼림에 애정을 쏟아가며 공부하면 참 살 맛 날 것 같은데, 그리고 또 누구더라, 유아교육에 관심 있었던, 그리고 또 그래, 여기 사범대가 있으니......

"혼자 뭘 그렇게 생각하고 계세요?"

오랜만에 다가온 윤지호, 동그란 머리통을 보니 웃음이 난다.

"여기 말이야, 지방이긴 해도 국립대라 학비도 그나마 저렴하겠다. 그치?"

"네, 쌤 덕분에 생각이 많아졌어요."

"으흠?"

"여기 삼림학과가 있대요, 알고 계셨어요?"

"그래? 뭐 하는 학과래?"

"몰라요. 그냥 식물 연구하겠죠, 뭐. 식물 의사가 되고 싶어요."

"아픈 식물 고치는 의사?"

"네. 멸종 위기의 식물도 많고, 우리나라 식물 지도가 해마다 달라지는 거 아세요? 고치는 것도 필요하고 보존하는 것도 필요해요."

"사람 먹고살기도 바쁜데, 뭘 식물을 고쳐?"

"쌤, 생태계는 식물이 딱 바탕이죠. 쌤, 진짜 무식이 뚝뚝. 인정? 하긴 식물 얘기할 때 김치까지 가는 거 보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유식하신 알로카시아 아저씨나 제발 공부 좀 해서 우리나라 산과 들 좀 지켜주세요."

"쌤, 그런 건 지식으로 지키는 게 아니에요."

"식물 얘기 나오니까 잘난 척 완전 쩐다. 저리 가, 나 피톤치드 쐬는데 방해하지 말고."

쫓아버려도 쫄래쫄래 따라온다. 그래도 나는 근황 같은 건 묻지 않는다. 발끝에 떨어진 꽃잎들이 몰려다닌다.




마음으로 지키는 거잖아, 나도 다 알거든?

살아 움직이는 건 언젠가 다 죽는다고, 사랑이라는 건 무의미한 거라고,  사방에 벽 치고 담 쌓으며, 스스로 담 밖으로 떠돌던 네 마음. 바위 같던 네 마음이 점점 촉촉하게 부서져 자갈이 되고 흙이 되어 그 위에 죽지 않을 것 같은 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시작한 거잖아. 그 마음으로 지켜내야 하는 거잖아. 세상의 모든 나무들과 또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 나무들을 고쳐주고 지켜주고 싶은 거잖아. 기특한 알로카시아, 이젠 꽃길만 가자. 네 앞날이 이 숲처럼 평온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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