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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Oct 30. 2021

[#연재 소설]가장 보통의 학교_30

독립 전쟁 01

민지는 아이돌 광팬이다. 

아이돌 문맹인 나는 이런 정서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냥 사진만 봐도 헤벌쭉하는 게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입덕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저렇게 이쁘장하게 생겨서 이쁘장한 말만 골라 하고 이쁘장하게 춤도 추면서 날 볼 때마다 이쁘장하게 웃어주면 내 마음 다 탈탈 털어줘도 아깝지 않을 듯. 나는 워낙 금사빠로 소문난 사람이라 수시로 망상 속 데이트 상대를 바꿔가며 혼자만의 사랑과 이별을 기쁘게 감당하고 있지만, 민지 같은 아이돌 팬들은 수준 높은 질서와 도덕성으로 아이돌의 정체성을 보호하며 그들과 깊이 있는 신뢰를 바탕으로 팬 문화를 창조해나가는 놀라운 사람들이라, 쉽게 입덕하지 않을 뿐아니라 함부로 탈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이돌 팬이라고 하면 일단 기본적으로 뭔가 의리있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런 편견은 절반은 맞아떨어진다.

왜냐 하면 민지가 작년에 처음 사귄 친구와 지금까지 단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반은 틀렸다. 한번 토라지면 영원히 남남이 되기 때문에. 그간 만났던 친구들은 단 한 번의 실수로 민지와 손절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유일한 친구인 유진이는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은 놀라운 성품의 소유자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이걸 의리라고 해야 하나 싶긴 하다. 하여튼 뭔가 감정이나 열정, 혹은 관심에도 아이돌 덕질같은 광적인 면이 있어 보인다. 민지는 관계에서 'all or nothing' 을 원한다. 누구에겐 80%, 누구에겐 40%, 이런 다양한 관계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관계 속에서는 자주 외롭다.

'all' 인 경우에도 상대가 조금이라도 여백을 가지고자 하면 외로워지고, 나머지의 관계들은 모조리 다 'nothing'이기 때문에 항상 외로움의 강물 속에 담겨 있다. 따라서 민지는 대체로 아주 극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외롭다. 그래서인지 민지는 외롭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외롭다'와 '외롭지 않다'라는 단어를 '기분이 나쁘다'와 '기분이 좋다'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듯 하다. 외롭다는 것은 자신을 누군가 공감해주거나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소통 절벽 앞에서 느끼는 감정일 텐데, 이렇게 폐쇄적인 관계성을 추구하다 보면 아무래도 외로울 기회가 많을 것 같다.




민지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멍하게 그냥 교실에 앉아만 있다. 그리고 눈은 어딘가 허공을 좇는 중. 여기 앉아있는 건 두고 온 영혼의 그림자려니 하고 이해해야지. 집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팬카페 방문, 오빠들의 sns와 공식사이트 방문, 관련 기사 정독 등등 기본 활동에 들어간다. 그것만 해도 사실 남은 하루가 꽉 찬다. 그리고 짬짬이 공상에 잠긴다. 

"엄마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계시니?"

"엄마는 돈 달라고만 안 하면 별 말 안 해요."

"근데 덕질에도 돈이 들잖아."

"제 용돈 모아서 쓰는 거죠. 전 아무 것도 안 사 먹고 싹다 울 자기한테만 써요."

"으이그, 그냥 맛있는 거 사 먹고 너 하고 싶은 거나 해. 너 안 보태도 그분들 잘 먹고 잘 산다."

"그게 낙이죠. 그게 나 하고 싶은 건데."




민지는 초6때부터 덕질을 시작했다.

그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민지의 사촌 언니가 하필이면 그분의 콘서트 당일 맹장염으로 응급실에 갔다. 얼마든지 그 티켓을 팬카페에 올려 티켓비를 회수할 수 있었지만,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티켓 값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공연 시작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사촌 언니는 그 티켓을 급히 민지에게 넘겼다. 민지는 얼결에 사촌 언니의 친구들과 긴급 접선하여 생애 최초로 콘서트장에 입장했다. 티켓을 얻은 댓가로 콘서트장 앞에 길게 줄을 서서 무료 나눔 굿즈를 받아 챙겨올 것, 특히 다른 멤버들의 사진을 사촌 언니의 남편분 되시는 ('형부라고 불러라.') 멤버의 포카(포토카드)로 교환해올 것, 물론 공연 실황 직캠 기본 등등, 전쟁 중에 나라를 구하는 사람처럼 마취하러 가기 전까지 그 격한 진땀 통증 속에서도 민지에게 시시콜콜 지시사항을 전달했다고. 




콘서트장에서 민지는 거듭났다.

팬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의 삶이 환호되는 것을 느꼈고, 아이돌 오빠들의 상큼한 미소 응답을 보며 자신의 삶도 저런 환한 미소로 응답받을 일들을 기대하게 되었다. 저렇게 싱싱하고 활력이 넘치는 세계가 다 있나. 민지는 무대를 사랑하고 오빠들을 사랑하고 이제는 덕질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입덕치곤 너무나 강렬하고 수위가 높고 고급스러운 시작. 그야말로 하이라이트에서 시작된 입덕. 이건 그냥 총 맞은 거나 다름 없다. 민지는 콘서트장에 영혼을 놓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 5년 째, 그 아이돌 오빠들 중 특히 제이 오빠의 '마누라'로 살고 있다.




결혼 생활에도 권태기는 온다.

제이 오빠의 잘생김이 생의 이유이고 덕질이 민지의 하루치 부스터이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남편 얼굴만 뜯어먹고 살 순 없는 노릇. 게다가 그 오빠는 민지의 깊은 이야기는 들어주지 못했다. 그게 민지에게는 소망이고 절망이었다. 그 오빠는 알아서는 안 될 이야기, 하지만 그걸 모르고는 민지를 모르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이야기. 민지는 그 이야기가 너무 심각한 비밀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나누지 못했고, 스스로가 만든 벽에 갇혀 누군가와 깊은 우정을 나눌 수도 없었다. 그건 가족들과도 나눌 수 없는 비밀이었다. 아니, 가족과는 절대 나눌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런 민지가 내게 말을 걸어올 때엔 좀 난감하긴 했다.

일종의 덕질처럼, 매 쉬는 시간마다 내 자리에 와서 붙어 앉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단짝 유진이랑 같이 왔다. 매점에 들렀다가 교실에 가기 전에 꼭 들러 먹던 부스러기를 놓고 가거나 앞뒤 없는 웃음을 시끄럽게 남겨두고 갔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올라치면 교무실 내 자리 앞에 서서 왜 이제 오느냐며 눈을 흘겼고, 더욱 덕질스러운 면모를 발휘하여 여교사 화장실 앞을 어슬렁거릴 때도 있었다. 나는 결코 잘 생기지도 않았고 민지의 'all'이 되기엔 너무나 공적인 만인의 연인(?)이었기 때문에 이 아이의 덕질의 대상으로는 글렀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에 꽂힌 건지 민지는 맹목적으로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냥 쌤이 좋아요, 꺄르륵~"

뭐,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이유 없이 한번씩은, 외로움을 배설할 누군가가 필요할 때가 있다. 나도 처음 학교에 부임할 때면 혼자만의 알 수 없는 낯섦과 외로움을 괜히 작은 탁상 화분에 꽂아 돌보긴 했기에. 




사실 민지가 찾아오기 시작한 날을 나는 기억한다.

그날 수업 때 나는 나의 독립 생활의 시작에 대해 떠들었다. 난 대학 학창 시절에 시작된 내 독립이 매우 자랑스러웠지만, 사실 첫날부터 매우 처참했고 외로웠다고. 나이 스물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다고. 가족의 사랑에 관한 시를 나누면서 이 철없는 중생들에게 괜히 뭔가 가치관 교육 비슷한 걸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여대의 기숙사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고, 특히 '독립'이라는 단어에 매혹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나는 고딩이 졸업과 동시에 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형태의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했지만, 실제로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독립이란, 사실 그냥 '집을 나오는 것'의 가장 그럴 듯한 형태, 즉 '가출은 아니지만 집을 나가는 것'이 주는 건전함과 당당함, 그리고 확실함이 보장된 '집 나감'이다. 그들은 그런 '독립'을 매우 열렬히 동경했다. 이야기는 결국 '가족을 사랑하자'에서 '대학이나 잘 가라'로 결론지어진 씁쓸한 수업이었다. 




수업 후, 민지는 곧장 나를 따라왔다.

기숙사 말고도 독립의 여러 형태에 관해 연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봐도 대학과 큰 상관이 없어보였지만, 대학보다는 독립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며 민지는 그날부터 내게 입덕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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