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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Nov 01.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32

독립 만세 03

그랬다. 

듣고 보니 민지의 덕질 증후군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아이가 엉뚱한 남자애에게 빠져버릴 일은 정말 없다. 민지는 아무에게도 빨대를 꽂지 않을 것이다. 함부로 꽂았다가는 된통 무서운 일을 당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이 지긋지긋하고 특히 남자는 더욱 끔찍하고 두려운 존재이다. 민지는 천사의 미소를 짓는 제이 오빠만이 유일한 인간성의 완성으로 보였다. 제이 오빠에게는 아무런 흠이 없어야 했다. 민지는 제이 오빠와 같은 천상의 존재를 통해, 간신히 땅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버러지 같은 자기 존재를 숨죽이며 수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이 오빠와의 만남은 운명적이라고 할만하다.

제이 오빠마저 몰랐다면 민지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사촌 언니의 맹장이 그날 심하게 아파줘서, 제이 오빠를 만날 수 있었고, 비록 실제로 관계를 맺고 사는 건 아니라 할지라도 간접적으로나마 팬으로서 이렇게 멋진 오빠를 만나 이상적인 존재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마지막 환멸을 참아낼 수 있었다. 그 환멸은 새아빠를 향한 것이기도 했고 또 나를 배신한 엄마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민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기에, 그냥 제이 오빠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민지는 아마 죽을 때까지 제이 오빠만을 사랑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함부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렇지만 단 한 번의 사고나 사건이 주는 트라우마는 부서진 렌즈와 같아서 온 세상을 일그러뜨리고 만다. 그 렌즈로 보는 세상은 이미 그런 세상으로 일반화되어 있고, 그것이 오류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 사람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민지는 한꺼번에 많은 것을 잃었다. 렌즈가 부서지고 민지의 세계도 한 번에 다 부서졌다. 가족을 잃었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심하게 생겼으며, 특히 아빠, 아버지, 어른 남자에 대해, 그들에게 귀속되어 있는 모든 권위에 대해 분노가 생겼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일은 결혼이고, 다음으로 한심한 일은 출산이며, 마지막으로 한심한 일은 재혼이라고, 그중에서 최악은 서로 숨고 숨긴 재혼이라고, 그 모든 행위들이 범죄의 시작이며 환멸의 끝이라고 여겼다. 나는 그런 민지의 생각을 지금은 존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지는 독립이 절박했던 것이다.

민지에게 있어서 독립은 철없는 고등학생의 반항이나 낭만적인 자기만의 세계가 아니라 생존과 자기 방어 본능이다. 살기 위해 집을 나와야 했다. 새아빠를 신고하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 남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 그냥 실수일 뿐이라고, 그날 딸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간 자기 잘못이라고, 아이가 생각 없이 술을 받아먹은 것이 문제의 시초였다고, 우리 엄마 맞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그 남자 편을 들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민지는 그들과 싸우거나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었다. 남은 방법은 'all or nothing', 그 집에서 그대로 죽어버리거나 모든 걸 다 싸들고, 남은 호적까지 다 파버리고 나오는 것뿐이었다.




어쩌면 할머니 댁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냥 그대로 할머니가 해주시는 밥이라도 얻어먹으며 학교를 다니는 것이 어때?"

"할머니 밥은 나쁘지 않죠."

"그럼 학교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냥 할머니 댁에서 지내지 그래?"

"그래도 싫어요."

"어떻게 나오려고? 방법이 있어?"

"쌤, 기숙사 말고요, 혼자 또 살았을 때 어떠셨어요?"

"음, 아무래도 밥이 부실했지. 그래도 친구랑 사는 것보단 혼자가 맘 편하고 낫더라."

"안 무서웠어요?"

"무섭긴 해, 난 은근 겁쟁이라. 매일 불 켜놓고 자고. 외출할 때에도 불 켜놓고 나갔어. 캄캄한 집에 들어오기 싫어서."

"전 집이 더 무서워요. 가족이 더 무섭고."

"상담이나 치료받아볼래? 마음이 너무 괴로우면 그런 것도 도움이 되는데."

"상담받았어요. 제가 불면증이 너무 심해져서 엄마한테 수면제가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정신과에 다녔어요."

"엄마는 별말씀 없으셨어?"

"그냥 약 잘 챙겨 먹으라고 하고, 제가 하도 미쳐가니까, 지금 돈 모으는 중이랬어요. 저 방 얻어준다고."

"독립, 진짜 곧 하겠네, 민지."

"쌤, 독립 아니고, 내전이요."




언제나 본인이 얼마나 원하느냐의 문제이다.

나는 답장과 상담을 통해 알게 된 비밀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묻고 싶었고, 부모님 모두 불러다가 눈물 쏙 빠지게 혼내주고 싶었다. 아이가 혼자 감당하고 숨죽였을 시간들을 그들에게도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었다. 나는 정말 민지에게 그 순간만큼은 'all'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민지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복수도 법적 책임도. 오직 혼자만의 공간, 아무 간섭도 권리도 내세우지 못할 가족과의 단절, 오직 nothing! 그것이 진정한 보호이고 도피이며 치유라고 여겼다.




비밀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다.

이 비밀을 알고도 'all'이 되어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가족마저도 외면한 상처와 고통에 같이 울어줄 친구 따위는 존재할 것 같지 않아서. 그래서 어차피 안 될 걸 알고 'all'을 추구했다. 어차피 모조리 'nothing'이 될 거란 걸 알기에. 그런데 유진이가 같이 울어줬다. 그리고 덕질 타깃으로 삼았던 내가 같이 울어줬다. 덕질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들은 덕질할 맛이 나는 사람들을 잘 구별해낸다. 나는 기꺼이 민지의 사랑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덕질에 흥이 나는 존재가 되어주었다.




드디어 민지의 내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부랴부랴 퇴근 후에 근처에서 치킨을 두 마리 시키고 민지의 이사 축하를 위해 휴지도 한 두루마리 샀다. 파티라고 해봐야 고작 치킨에 사람이라고 해봐야 나까지 딱 셋. 그래도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니까, 콜라로 짠, 건배라도 해야 마땅하다. 작은 원룸은 침대와 작은 모니터를 얹은 책상, 그리고 옷을 거는 행거와 작은 서랍장이 빈 구석 없이 벽을 네모나게 두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작은 공간에 셋이 간신히 비집고 앉았다. 그래도 침대 쪽 벽은 민지의 남편 사진으로 꽉 찼다. 그래서 민지는 외롭지 않았다. 가족을 떨어져 나와 혼자 지내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낯설다. 하지만 외롭지 않다고, 벽에 붙은 아이돌 오빠 제이의 사진을 보며 다짐처럼 말했다. 이 자식, 외롭군, 친구 유진이가 놀리듯 말했다. 아니라고, 이미 설득력을 잃은 민지가 힘없이 되풀이했지만, 외로움이 분노와 공포보다는 나을 것 같다.




나는 그래도 찜찜하다.

민지 엄마는 이로써 딸에게 못다 한 죗값을 다 치르려는 것 같고, 할머니도 매주 민지의 작은 냉장고가 꽉 차도록 남동생과 최대한 차별 없이 반찬을 싸다 날라주는 것으로 눈 감아온 죄를 씻어내는 것 같았다. 이런 결론이 나는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민지는 영원한 비밀이 문 밖으로 돌아다니다 집 대문부터 부수며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다. 기대야 할 엄마가 내 편이 아니기 때문에, 법과 싸운다면 엄마와도 싸워야 하기 때문에. 내 고민은 뼈를 삭이는 것 같았다. 과연 내가  2년 전 일을 꺼내어 촛불을 밝히고 대신 싸울 수 있을까? 무엇이 민지를 돕는 일일까? 고민 없이 이판사판 꺼내어버릴까? 민지의 독립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 민지의 납덩이가 이제 내게로 옮겨온 것 같았다.




민지에게 신고하자고 제안했다.

자수하여 광명 찾는 심정이었다. 납덩이를 이제는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민지는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것 같냐며, 이럴 거였으면 벌써 신고했을 거라고, 그나마 남은 가족과의 끈마저 끊고 가야 할 길에 대해 제발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 쌤 양심이 햇볕 쬐겠다고, 그나마 남은 내 인생도 다 거덜내고 싶은 거냐고. 혼자 마음 편하시겠다고, 그깟 신고? 신고할 거였으면 내가 먼저 그 새끼 죽여버리고 자수했을 거라고 했다. 엄마 살리려고, 그래도 엄마는 내 엄마여야 하니까. 엄마, 그런 엄마도 엄마라고, 그래, 민지에게 그 엄마는 'all'이었다.




합법적 영역에 있다고 해서 다 정답은 아닌지도 모른다. 

음지에서도 이끼가 살아야 한다. 민지는 쨍하게 피는 붉은 꽃보다는 이끼를, 그늘에서도 무성하게 피는 고사리를 선택한 것 같다. 고요하고 비좁은 그 원룸에서, 민지는 지금 그래도 그럭저럭 행복해지고 있다. 민지는 원룸에서 밤마다 내 카톡에 제이 오빠 사진이나 자기가 쓰다 만 판타지 추리 소설 같은 걸로 도배하고 다음날 지각을 일삼았다. 그래도 웃는다, 민지가. 이제는 다시 오빠에게, 팬카페 생활에, 그리고 망상 같은 소설 쓰기에 점점 되돌아가고, 조금씩 잠이 늘고 있다. 세탁을 미처 못했다며 교복 와이셔츠 대신에 체육복을 입고 다니는 민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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