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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Nov 02.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33

엄마 보호자 01

유진이는 민지랑 사실 비슷한 점이 있다.

유진이도 아빠가 새아빠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 새아빠는 정식으로 결혼의 '인증' 과정을 거쳤다는 것.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때로는 어떤 '자격'이나 '의무' 같은 것에 중대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기에 유진이는 민지랑 명백히 처지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진이의 처지가 더 낫다는 뜻은 아니다.

각자의 기억과 그 기억의 무게, 그 무게에 짓눌린 자국의 고통은 다 각자의 몫이기 때문에. 유진이는 중학교 때부터 엄마랑 같이 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엄마랑 새아빠랑 셋이 같이. 엄마랑 새아빠는 그냥 세트이기 때문에 따로 말하든 붙여서 말하든 큰 의미는 없다. 어찌 되었든, 엄마는 유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필리핀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돌아왔다. 갈 땐 혼자였는데 올 땐 새아빠와 함께였다. 내내 외할머니 댁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유진이는 돌아온 엄마와 다시는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에게 엉겨붙어서는 안 된다.

엄마가 힘들어하면 곤란하니까. 몇 년간 아이 없이 지내던 엄마에게 유진이는 딸이지만 낯선 존재가 되었다. 훌쩍 커버린 딸이 이제는 엄마보다 키도 더 크고, 힘도 더 세다. 엄마를 귀찮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엄마를 도와주고 배려해준다. 엄마는 딸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의 일이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어른스럽게 구는 딸이 마냥 다 컸다고만 생각했다. 




유진이 새아빠는 쿨한 사람이다.

유진이를 예뻐해 주지만, 항상 엄마가 더 먼저였다. 물에 빠지면 유진이보다 엄마를 먼저 건질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엄마를 팔불출처럼 사랑할 뿐이다. 엄마도 유진이도 그걸 알고 있다. 유진이가 보기에 새아빠는 그냥 사랑에 반쯤 미쳐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끔 유진이가 두 분 사이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언제든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이면 사라져 줄 거라고. 그래야 더 이상 엄마가 외롭고 괴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이가 모르는 세월,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엄마는 아빠를 대신할 누군가로부터 아빠로부터 받은 상처를 닦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딸이 침범할 수 없는 구간이 엄마와 새아빠 사이에 분명히 존재했고, 그걸 존중하지 않으면 엄마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엄마 생각과는 다르게 유진이는 다 기억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을까? 차라리 잊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도 그게 힘들어서 필리핀까지 도망갔다 온 거면서. 엄마는 어른이니까 어떻게래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는 여권이 뭔지, 어떻게 해야 기억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는 비겁했다. 그래 놓고도 여전히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딸에게조차도 조심스러운 존재가 되어 돌아왔다. 생으로 앓고 죽을 만큼 아팠던 건 오히려 유진이인데 말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날따라 아팠다. 속이 울렁거리고 열이 나서 학원은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태권도 관장님은 인정사정 봐주는 분이 아니다. 일단 집에 가서 엄마에게 전화하고 할머니에게도 전화를 해야겠다. 간신히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문의 차가운 감촉이 생생하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별 모양을 눌러야 하는데, 이상하게 누르기가 싫다. 속이 안 좋아서 빙글빙글 도는데, 어서 들어가서 누워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것이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문을 열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 집 문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파서 이런 걸까? 그래, 그런가 보다. 그냥 다시 번호를 누르고 문을 벌컥 열었다. 또 이상하다. 문은 열었는데, 들어가기가 싫다. 현관에는 아빠 신발이 있다. 벌써 집에 와 계실 리가 없는데, 음, 그리고 집에 와 계신다면 내가 문 열면 유진이니, 하실 텐데, 음, 왜 아빠 신발은 있고 사람 소리는 안 나지? 속이 메스껍다. 




아빠? 아빠!

불러 본다. 신발은 있고 아빠 대답은 없다. 그런데 찾아보고 싶지 않다. 그냥 그대로 수화기를 들고 외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아파서 토할 것 같다고. 집에 왔는데 못 움직이겠다고. 앞 동에 사는 외할머니가 알겠다고 했다. 이모를 지금 보낼 테니, 같이 병원이라도 다녀오라고. 유진이는 왠지 얼른 집을 나가고 싶어서 그대로 현관문을 닫고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잠시 뒤 이모가 와서 어머, 왜 이렇게 열이 많아? 하더니 점퍼라도 입혀서 데려 가야겠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순간 이모의 비명이 들렸다. 형부, 형부, 소리를 질러댔다. 이모는 급히 119를 불렀다. 전화기를 붙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유진이도 몹시 열이 나서 그런지, 그냥 덜덜 떨렸다. 할머니가 달려와 유진이를 데리고 가셨다. 다음날 유진이는 아빠의 장례식장에 앉아있었다. 




열병을 앓았다.

장염이 심하게 왔다. 경황이 없어서 유진이를 잘 돌보지 못해서 그렇지, 유진이는 장례식장에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장례식장에서도 옷 갈아입는 작은 방에 내내 누워만 있었다.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또 덜덜 떨다가 깨어났다. 이모는 외할머니에게 계속 '애는 못 봤어.'라고 말했다. '유진이는 현관에 앉아 있었거든, 걘 못 봤을 거야. 보고도 침착하게 아프다고 전화할 리가 없잖아. 쟨 아무것도 몰라.'라고.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유진이는 그냥 모르기로 했다. 딱히 아는 것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거라고.




돈에 쫓겼다.

아무 방법이 없었다. 그대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렇다 해도 분별력이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아이 있는 집에서, 못 볼 모습을 보여줄 뻔했다. 모두가 그 부분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종종 주변의 반복적인 진술이 마치 마법 주술처럼 박혀 오래된 기억에 덧입혀진다. 색이 바랜 기억은 원래의 그림이 희미해지면서 종종 거짓마저도 진실처럼 손쉽게 인정하도록 만든다. 무엇을 보았든, 느낌이 어땠든, 유진이는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 아이, 다행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건 참 명쾌한 자기 방어기제가 되었다.

다들 그렇다고 하면 나도 그렇게 되면 되는 것이다. 민지가 며칠 째 넋을 놓고 상담실에서 울기만 했던 나날들과 이후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던 나날들 동안, 민지의 손등을 수도 없이 쓰다듬어 주던 유진이는, 그런 상담 분위기 떄문인지 아니면 민지를 위로하기 위한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느닷없이 깊이 감추어 두었던 진짜 기억의 한 조각을 꺼내어 햇빛 앞에 던졌다. 그리곤 민지보다 더 오래오래 울었다. 유진이는 그렇게 그 기억을 햇빛에 다 살라버리고 조금은 가벼워진 기억의 주머니를 침착하게 다시 동여매었다. 




어떻게 이렇게 아픈 걸 품고 살았을까?

아이들이 상담실에서 나가고 나서, 나는 민지의 납덩이와 유진이의 날카로운 유물을 가슴에 품고 비틀거리는 무기력한 나 자신에 대해 비난하며 울었다. 유진이의 찌르는 듯한 고통은 그렇게 기억의 조작과 지나간 세월 덕분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증은 아직 진행 중이다. 새로운 상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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