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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Nov 03.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34

엄마 보호자 02

유진이도 독립에 대해 고민해본 바 있다.

꼭 독립이 아니어도 좋다. 외갓집에 살았던 그대로 그냥 엄마랑 물리적 거리를 두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다. 우리 엄마인데도 새아빠의 아내이기도 했기에. 두 분 사이에 혹시 아기가 생겨 내게 의붓 동생이 생기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땐 왠지 내가 빠져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자꾸 겉도는 생각들이 뭉게뭉게 안방과 유진이방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건 단지 새아빠라는 존재 때문만은 아니다.

엄마는 말이 많이 줄었다. 원래 그랬던가?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엄마는 유리 인형 같다. 자칫 하면 깨뜨려질 것만 같은. 거의 이생의 갈등을 초월한 것 같은 처연한 아름다움. 그런 엄마가 가끔 말갛게 미소를 짓거나 유진이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면 그걸로도 유진이는 마음 깊이 알 수 없는 감정이 펌프질 한 우물처럼 차올라 눈물이 툭, 하고 터지곤 했다.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엄마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와 새아빠는 작은 아파트에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새아빠는 고양이를 좋아해서 거실 한 구석에 캣타워도 세우고 두 마리 고양이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꾸며주었다. 유진이방은 붙박이장이 한쪽 벽을 채웠고, 침대와 책상이 놓인 깔끔한 방이었다. 외할머니 댁에서 옷가방과 책가방을 챙겨 온 첫날, 혼자 침대에 누웠던 밤을 기억한다. 얼마나 설레고 또 얼마나 어색했었는지. 괜히 할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이건 또 무슨 감정이람? 좋고 싫은 복잡한 마음, 싫은데 좋은 이상한 마음, 유진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잘 잤니?"

"아, 음, 아니."

"음, 아직 낯설지?"

"할머니 보고 싶어. 엄마도 좋은데,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그래, 주말엔 할머니한테 바래다줄게. 할머니 집에서 자고 와도 돼."

"그래도 돼?"

"그럼, 유진이가 아직은 어색할 텐데. 이만 해도 씩씩한 거지. 걱정 마."

유진이는 섭섭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주는 엄마가 고마웠다. 그 뒤로 종종 주말에는 외할머니 댁에서 할머니가 해주시는 밥도 먹고 이모랑 영화도 보면서 예전처럼 뒹굴대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 주말 아침이었다.

이번엔 외갓집에 가기 싫었다. 그냥 집에서 조용히 쉬고 싶었다. 어젯밤에 엄마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끝끝내 거절하고 늦게까지 게임을 하다가 늦잠을 잤다. 엄마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유진아, 오늘 손님들이 오실 텐데, 넌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친구랑 영화라도 보고 올래?"

"아니, 누가 오는데?"

"그러지 말고, 용돈 줄 테니까 나가서 놀아."

"싫어. 귀찮아. 쉬고 싶어. 손님들 오시든 말든 난 조용히 집에 있을게."

"그래? 그럼 문 밖으로 나오지 말고 방 안에만 있을 수 있어?"
"누군데 그래? 아휴, 알았어. 방 안에만 있을 테니까 손님맞이 잘하셔. 난 지금부터 또 잘 거야."

"알았어. 유진아, 혹시 모르니까 방문 잠그고. 화장실도 지금 미리 다녀와."

"......"




손님들이 오시나 보다.

벨 소리가 들리고 엄마와 새아빠의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오셨다. 나가서 인사를 해야 할까? 아니다. 방 안에만 있으라고 했다. 방문을 잠그라고까지 했는데, 누가 설마 내 방 문을 열기야 하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글까? 누구지? 갑자기 몹시 궁금하다. 문에 귀를 바짝 붙인다.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리고, 남자 목소리도 들린다. 좀이 쑤신다. 빼꼼 문을 열어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지만, 엄마가 신신당부한 것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깔깔 껄껄, 거실에 둘러앉아 식사 중이신가 보다.

새아빠는 요리를 참 잘한다. 필시 갈비를 만든 것 같군. 겉절이도 만든 걸까? 맛있겠다. 우리 엄마는 시집을 잘 갔다. 다정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랑꾼을 만났으니. 나 같이 애 딸린 여자를. 새아빠는 초혼이라고 들었다. 그간 여자가 없었을 리도 없건만, 여태껏 결혼도 하지 않고 지내다가 우리 엄마를 만나 필리핀에서 무려 한국으로 들어와 살기까지 하다니. 그나저나 갑자기 배가 고프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이따 물어보기로 한다.




"며느리, 여기 문이 잠겼네?"

"어머, 왜 이러지? 여긴 게스트룸이에요. 어머니 다음에 오시면 여기서 쉬세요."

"오호홍, 우리 며느리, 그래 알았어."

"그만 둘러봐. 둘이 깔끔하게 하고 사네."

"그러게요, 여보, 내가 이렇게 오고 나니 이제 맘이 놓인다."

"엄마, 그만하고 이제 나갑시다. 커피 기가 막히게 맛있는 집이 있어."

"고생 많았다, 며느리. 이제 나가자."




웅성웅성하느라 아까는 안 들렸던 목소리들이 이젠 또렷하다.

하필 유진이방 잠긴 문 앞에서 떠드시느라. 며느리, 어머니, 엄마, 어쩌구, 새아빠 부모님들이 분명하다. 필리핀에서 여기까지 방문하신 건가? 나중에 나도 필리핀에 데려가서 새아빠가 살던 궁궐 같은 집 구경시켜준다고 했는데. 새아빠네 가족과도 인사할 거라고 했는데. 그분들이 여기 와 계시는데 나는 왜 인사하지 못하는 건지. 내 존재를 숨긴 걸까? 유진이는 침대에 숨 죽인 채 누워서 곰곰이 생각했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쯤 방문 밖으로 나가도 되는지를 잘 모르겠다.

다들 집을 떠났는데, 유진이는 내내 방 안에만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다가 잠이 들었다가를 반복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가을 해가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아, 유진이 나와봐. 유진아."

"......"

잠긴 문을 열어보다 두드린다. 

"유진이 안에 있니? 자니? 밥 먹어야지, 얼른 나와."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굶었다. 화장실도 한번 안 가고, 쥐 죽은 듯 방에 누워만 있었다. 갑자기 설움이 북받친다. 나가기 싫다. 엄마도 싫고, 새아빠도 싫다. 난 없는 존재구나. 없는 존재이니 부르지도 마시지. 아는 척도 하지 마시라고. 문도 두드리지 마시라고. 좀 제발, 그냥 날 내버려 두시라고. 자꾸 문 두드리고 불러대면, 나 진짜 제대로 사라져 줄지도 모르니. 그만 하시라고. 가족인 척, 부모인 척, 그만 좀 하시라고. 이제 내 위치를 똑똑히 알았으니, 연극은 좀 집어치우시라고!




새아빠네 가족은 모른다.

엄마가 애 딸린 과부였다는 사실을. 게다가 전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그걸 공개한 채로는 불가능한 결혼이었다. 아들이 느닷없이 한국에 가서 살겠단다.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겠단다. 보내어 놓고도 쉽게 방문하기 어려웠다. 벼르고 벼르다가 간신히 아들의 한국 신혼집을 방문했다. 좋아하는 고양이를 키우며 아내랑 알콩달콩 사는 모양이 행복해 보인다. 왠지 며느리는 늘 차분하고 조금은 우울해 보이지만, 그래도 우리 아들만 바라보며 사는 것 같아 보기 좋다. 언젠가는 둘 사이에도 예쁜 손자 손녀가 생길 것을 은근히 기대해 본다. 새아빠네 부모님은 매우 만족하고 돌아갔다. 언제 또 방문할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유진이가 모르는 사이에, 유진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누군가 방문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내 신발을 감추고 내 방문을 잠근 채 손님을 맞이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지. 엄마는 왜 다시 날 키우겠다고 데려왔는지. 새아빠는 어쩌자고 엄마랑 결혼을 한 건지. 어른들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유진이는 차라리 엄마가 필리핀에 있을 때가 나았다.




방문 손잡이를 잡고 엄마가 운다.

미안하다고. 엄마가 미안해. 흑흑 소리를 내며 운다. 새아빠도 미안하다며 방문을 노크하다 조용해졌다. 속이 뒤집혀서 계속 문을 잠그고 있을 수가 없다. 

"엄마에겐 아빠가 필요해. 새아빠가 엄마에겐 필요해, 유진아. 어흑흑, 미안해."

엄마에게 필요하단다. 새아빠가. 내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을 새아빠가 해준다. 새아빠는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를 얻기 위해서라면 나 하나 감추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유진이 머리는 너무나도 빠르고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다 이해했지만, 가슴이 뻥 뚫리는 고통은 빠르게 해결되지 않았다. 

"엄마, 자꾸 울면 다시 문 닫아버릴 거야. 그만 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 뚝 그쳐!"

중1 여자애가 엄마를 달랜다. 엄마는 딸이 달래어야 울음을 그치는 유리 인형이다.




다음부터는 미리 말해주기로 했다.

새아빠네 식구가 오신다고.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유진이는 지난번처럼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평소엔 별 얘기 없다가 아주 가끔 물어본다.

"유진이, 이번 주말에 할머니 댁에 갈래?"라고.

유진이는 시그널을 이해한다. 아무 말없이 외갓집에서 놀고 먹고 잔다. 아무래도 좋다. 엄마가 좋으면 다 좋다. 아빠를 보내고 나서 유진이까지 놓아버렸던 엄마가 삶의 의지를 가지고 유진이를 돌보러 돌아왔다. 그걸로 족하다. 아무리 새아빠가 있어도 유진이는 제 몫을 다하고 싶다. 엄마를 아프게 하지 말 것. 엄마를 울리지 말 것.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 것. 엄마가 원할 땐 셋이 행복하게 외식하고, 또 엄마가 원할 땐 조용히 외갓집에 가 있고. 그런 이중생활쯤이야 그간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독립한 민지를 보며 골똘히 생각해본다.

"쌤, 저도 집 나올까요?"

"생각해봐, 유진. 새아빠가 없었다면 혼자 늙을 엄마를 너 혼자 다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호호 할머니 될 때까지 사랑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넌 좀 자유로워도 되잖아. 엄마 보호자는 새아빠야. 네가 아니라. 이젠 좀 편하게 살자, 응? 집에서 애기 놀이 실컷 하고 이쁨 받으라고, 그냥."

"그럴까요? 애기 짓이 뭔데요?"

"글쎄, 그게 뭘까? 내가 알려줬다고는 하지 말고. 알았지?"

"네, 뭔데요?"

"반항. 크하하핫. 해버려, 그까이꺼, 반항 같은 거. 까불고 대들고 용돈 뜯어가고. 그런 것도 하라고 좀."

"네? 진짜요?"

"으이그, 이 답답아. 네가 어른 짓 하는 게 엄마는 더 아파. 네가 얼라 짓 해줘야 엄마가 더 건강해지지."

"아우, 반항을 어떻게 해요, 불쌍한 우리 엄마한테."




그래도 했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1학년으로 되돌아가서, 하루아침에 아빠와 엄마를 동시에 잃은 아이가, 가슴에 품었던 날카로운 그것 내다 던지고 엉엉 울었던 그날처럼, 아프다고 슬프다고, 내 유년 내 청춘 다 돌려달라고, 한 번쯤 떼쓰고 드러누우면 좋겠다. 다 큰 어른 아이, 아니, 아이 어른 유진이. 엄마 보호자 노릇 다 때려치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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