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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Nov 08.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35

사랑과 우정 사이 01

수업 때,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라는 편지 형식의 시 작품을 나누었다.

그러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이야기가 넘어갔고, 자연스럽게 내가 받은 가장 인상적인 편지에 대한 이야기로 삼천포가 시작되었다. 난 여고를 다녔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연예인 팬클럽의 팬덤 문화가 체계적으로 형성되지 못했고, 입시에 찌든 여고생들에게 매스컴이 가까이 와있지 못했다. 기껏 해야 라디오를 듣고, 좋아하는 음악이나 귀에 꽂는 정도. 그야말로 라떼 시절이다.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고 리더십이 있는 친구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유머도 풍부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면 그야말로 백점 짜리 남친 대리로 낙찰되고 만다.




나는 그런 여고생들의 남친 대리 같은 비운의 여고생이었다.

내가 받은 가장 인상적인 편지는 고백이 지나쳐서 '결혼하자.'라며 청혼까지 이어진 옆반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지금 굳이 해석해보자면, '나중에 크면 너 같이 유머러스한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싶어.' 라든가, '거의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네가 좋아.'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엔 '이 인간들이 날 뭘로 보고 이러시나?'하는 생각에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긴 만인의 남친 노릇을 떠맡은 나는 사물함에 넘치는 초콜릿과 손편지들이 증명하듯 엄청난 인기와 함께 그런 귀찮은 수모도 감당해야 했다. 




이런 썰을 풀었던 게 어떤 울림이 되었을까?

선호가 점심 시간에 찾아와서 잠시 같이 걷고 싶다고 했다. 철쭉이 지고 장미 덩쿨이 둥글게 운동장 앞 교정에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아흑, 장미여, 사랑의 계절이 흐르고 있다.

"쌤, 기분이 어땠어요? 여자들이 좋아하면?"
"뭐, 여자든 남자든 날 좋아해주면 좋은 거지."

"그래요? 쌤은요? 쌤도 여자가 좋아요?"

"야, 존경할 만하고 너무 멋있는 사람이라면 남자 여자가 어디 있냐? 인간 대 인간으로서 완전 사랑하겠지."

"그럼 여자를 사랑한 적도 있어요?"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냐...흠...범위를 넓혀야 하는 질문인가? 아니면 좁혀야 하는 건가? 넓은 범위로는 여자들 중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매우 매우 많지."

"에휴, 그냥 잊어주세요."

"왜? 넌 남자가 좋아?"

"......"




어렸을 때부터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점점 키가 자라는 남자 아이들이 멋져 보였다. 목소리가 점점 굵어지고 행동이 조금 거칠어지고 턱선이 조금 더 각이 생기는 모습들이. 자기 자신도 그랬다. 선호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반바지를 입으면 다리에 털이 북슬북슬했다. 이런 내 모습도 멋지긴 하다. 그런데 다른 녀석들이 더 멋지다. 아니, 남성이란 도대체 왜 이렇게 아름답고 순수한 걸까? 남자라는 존재는 마치 인간의 원형 같다. 최초의 인류가 남성으로 묘사되는 신화도 적지 않다. 아담도 신이 빚은 최초의 인간이 아닌가? 완벽한 인간의 시작은 남성에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이건 남성 우월주의 같은 건 아니다.

남성과 여성에 대해,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호불호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냥 남자가 좋았다. 남자가 멋지게 느껴졌고, 나 자신이 남자인 것도 자긍심이 넘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어렵다. 남자가 너무 좋아서. 이제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마땅한 나이 아닌가? 어렸을 때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느꼈던 해방감, 특정 그룹에 속했을 때 느끼는 자부심, 그런 것을 뛰어넘어 지금은 뭔가 이상한 욕망 같은 걸 느낀다. 저 남자, 갖고 싶다, 이런 마음. 이제 점점 미쳐가는 걸까?




선호는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쩌면 그냥 좋았던 거다. 이런 본인의 정서에 대해 사실 그때부터 자각하고 있었던 거다. 난 왜 이상하게 남자인데 남자가 좋지? 왜 남자인데 남자를 보고 떨리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애가 나도 같은 마음으로 좋은 거지? 그 아이와 친구보다 더 특별한 친구가 되고 싶은 내 욕심은 왜 이해받지 못할 것만 같지? 그런 마음을 외면받을 것이 뻔해서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는데, 왜 오늘 난 쌤한테 콧물 흘려가며 떠들고 있는 거지? 젖은 눈을 차마 마주볼 수가 없어서, 나는 좀 앉고 싶었지만 계속 걸었다. 




여고 시절에 나 때문에 저렇게 우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를 좋아하는데 같은 여자끼리 사귈 수도 없고.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데 인기가 많아서 눈치껏 들이대야 했다. 난 친구들끼리 잘 지내면 좋지, 뭘 자꾸 귀찮게 서로 신경을 쓰나, 하고 불편해하며 그들의 마음에 대해 조금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냥 교생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잠시 흘러가고 지나가는 짧은 마음일 뿐이기에. 그런데 선호는 잠시 스쳐가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니까 어렵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동경의 대상이 남자라서. 설렘, 애정, 애욕의 대상이 자꾸 남자라서. 걸어온 길이 남들과 색깔이 달라서, 돌이켜지지 않는 발걸음에 자꾸 힘이 실려서.




말은 점점 없어지고 그냥 막연히 계속 걸었다.

좁고 뻔한 교정인데, 갈 곳도 없는 네모난 학교 담장을 따라, 우리는 더 사람이 없는 어딘가 으슥한 곳으로 자꾸 걸어야만 했다. 선호의 콧물이 멈출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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