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가운 열정 Nov 17.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37

사랑과 우정 사이 03

그래, 숨이 막히겠다.

반듯한 부모님의 고결한 품위와 사회적 지위에 비해 선호는 너무 가장자리를 서성이고 있으니. 게다가 어제오늘 부르짖은 대나무 숲도 알고 보면 부모님 세대와 같은 통속이고. 마음은 아프지만 서로 다른 신념이 이렇게 좁혀지지 않을 때, 어쭙잖게 이해해주고 동의해주는 모양새를 보이기보다는 그냥 대놓고 한 번은 부딪혀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한테 맨날 편지 쓰던 애들, 대학 가자마자 남친 사귀더라."

"크크, 그랬어요? 배신자들이네."

"배신은 무슨, 당연히 그런 거지. 나도 곧장 남친 사귀었어. 한겨울에도 미니 스커트에 부츠 신고. 긴 머리에." "여성여성했네요."

"그러게. 쇼트커트였던 만인의 남친이 말이야. 이제 와서 얘긴데, 나 고딩 때 류준열 닮았었다. 웃기지?"

"대박! 진짜 웃겨요, 쌤."

"너도 대학 가면 류준열 닮았던 쇼트커트가 변신해서 나타난 애 사귀게 되지 않을까?"

"글쎄요, 쌤 같은 성격이면 얼굴 상관없이 한번 사귈지도 모르죠."

"헐, 얼굴 상관없이? 야, 외모 비하?"

"흠, 여자냐 남자냐, 이쁘냐 뭐 그런 것보단, 그냥 인간성에 끌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거야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 때 당연한 거고. 난 네가 그냥 널 규정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규정하려는 게 아니라 자각하기 시작한 거죠, 쌤."

"아닐지도 모르잖아.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자는 거지."

"별로 도움은 안 되지만, 쌤 마음은 느껴져요. 좀 위로는 되네요."

"아, 그래? 그렇지. 도움이 어떻게 되겠냐? 그래도 그건 너의 여러 면모들 중 한 측면일 뿐이야. 너무 그 문제에 꽂혀서 그게 너의 모든 문제인 것 같이 확대하진 말자. 넌 이미 완벽해. 가끔 한 가지 생각에 꽂히면 다른 여지를 두지 못하고 그 우물에 갇혀서 빙빙 돌다가 그마저도 힘들어지면 그냥 멈추거든. 그 자리에 붙박이가 되어버리지."

"네. 그래도 쌤이랑 이렇게 터놓고 얘기라도 하니까 살 것 같아요. 혼자 죽을 지경이었는데."

"그래, 언제든지 와서 또 떠들다 가라. 대나무 숲 해줄 테니까."




선호가 대나무 숲으로 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문제에 관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프랑스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나가도록 교육하고 있대요."

"나보다 아는 게 많구나. 프랑스는 그런 쪽으로 빠른 것 같아. 혁명의 나라잖아."

"걔네는 이름에 여성형, 남성형이 정해진 경우가 많대요. 이름에서부터 성별이 정해진 거죠."

"우리도 그렇잖아. 영희, 철수. 누가 봐도 영희가 여성이지."
"그건 그렇죠. 그래도 예를 들면 제 이름이 남자 같이 '선호'인데, 학교나 도서관과 같은 교육 기관에서 사용할 때에는 자기 이름을 닉네임처럼 하나 정해서 쓸 수 있는 거죠. 쌤이 저를 '선호'라고 부르지 않고 이를 테면 '선희'라고 불러야 한다고, 제가 정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법적으로."

"교육 현장에서 자기 성별을 스스로 정하고 드러내도록 보장한다는 거네."

"꼭 그런 걸 하지 않더라도, 뭔가 이상한 시선으로 본다거나 차별한다거나 그런 분위기는 좀 나아질 것 같아요. 자신을 쉬쉬 숨기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로요."

"드러내고 싶어?"

"아, 아뇨."




아무래도 답답할 것 같다. 

자신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나는 사실 자연의 질서와 사랑의 섭리를 생각하고 인류의 존속과 번영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면 이 문제에 대한 나만의 답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냥 제발 취향을 좀 바꿔보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지금 선호에게 필요한 건 꼰대의 잔소리나 훈계도 아니고 사회적 변혁이나 제도적 보장 같은 것도 아니다. 내가 해줄 수 있고,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그저 경청뿐. 어쩌면 공감까지는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공감은 동류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안도감이기 때문에. 그건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그냥 들어주는 것이 전부인 관계. 이렇게 죄책감과 소외감에 눌려 자기가 가진 빛나는 보석들을 등에 짊어지고 한 번도 펼쳐보지 않고 있는 아이의 이야기를 그냥 고개 끄덕이며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 네 장점들을 봐.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봐. 왜 네 멋진 모습들을 내팽개쳐두고 딱 그 문제만 확대하느냐고. 왜 그 문제에 대해 존중해주어야만 네가 존중받는다고 느끼는 거냐고. 그냥 너는 너일 뿐이야. 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존재라고. 나는 아직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흐르는 피부터 닦아줘야 하니까.




"좋아하던 애가 있었어요."

선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선호가 이 학교로 온 이유였다. 그 아이는 다른 학교로 갔다. 그 아이와 같은 학교에 진학하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너무나도 완벽한 남자애였다.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진짜 많았고, 같은 남자애들도 항상 무리 지어 다니며 그 아이와 함께하는 걸 좋아했다. 옷 입는 스타일도, 그냥 교복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멋있었고, 머리 모양도 매일 누가 드라이라도 해주는 것 같이 앞머리가 한쪽 옆으로 가지런히 넘어가 있었다.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학생 회장에, 웃기는 얘기지만 집도 잘 사는 편이었다. 큰누나는 스튜어디스라고 했다. 집안이 다 잘생기고 예뻤다. 말도 곱게 했다. 선생님들도 그 아이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대기 일쑤였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그냥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사람. 동급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많은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sns에 사진이 한 장 올라오면 연예인처럼 인근의 모든 학교에서 '좋아요'와 폭풍 댓글이 이어졌다. 그 아이가 사입은 옷은 그 시즌에 그 학교에서 유행했고, 그 아이가 신은 신발은 체육 시간마다 운동장에서 한두 켤레씩 더 많이 목격되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 그 아이의 베프가 되고 싶었다. 




기회가 왔다.

같이 수행평가를 하게 되었다. 조별로 환경보호 캠페인용 영상을 제작해서 발표하는 것이었는데, 그 아이와 한 조가 된 건 천운이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평가는 'A' 받을 거라고 다들 흥분했다. 촬영과 편집을 맡은 선호는 며칠간 같이 붙어 다니며 콘셉트를 의논하고 촬영하며 그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아이가 담긴 영상을 돌려보며 편집하는 내내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역시나 좋은 작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그 아이와 많이 친해졌다. 선호도 워낙 사람됨이 좋아서 아이들이 좋아했기 때문에 이질감 없이 쉽게 어울리게 되었다. 그 둘은 서로를 자주 챙기고 체험학습이나 주말 축구에도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뿐이다. 언제나 그 아이에겐 여자 친구가 있었고, 선호는 늘 마음이 아팠다. 스스로가 내린 어려운 결단이었다. 손절. 그리고 다른 학교 지원. 부모님은 깜짝 놀랐지만, 여기서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며 벌써 1년이 흘렀다. 잊히진 않지만 가까이 가지도 않는 이 거리가 선호의 숨 쉴 공간이 되었다. 




고1, 선호는 낯선 곳으로 왔다.

같은 중학교에서 온 친구가 거의 없어서 외로웠지만, 선호의 성격이 워낙 선량해서 친구들은 금방 새로 사귈 수 있었다. 그러다 또 눈에 띄는 아이가 생겼다. 여기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 선호는 열심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 왜 여기서도 이러느냐고. 왜 안 그러기로 마음먹어도 안 되는 거냐고. 이쯤 되면 선호에게도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잘생기고, 성격이 좋다. 키도 크고 옷도 잘 입고, 위트가 넘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사회성이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어디서나 존재감이 확연한 사람. 고1 같은 반에 있던 그 친구와 지금은 다른 반이 되었지만, 4개 학급밖에 되지 않는 인문계열에서 딱히 벗어날 수 없는 그 존재감에 지금도 종종 선호의 마음이 시달리곤 한다고. 




멋있는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마음이 쉽게 살랑거려서 곧잘 짝사랑처럼 질주할 때가 있겠지. 나도 남부럽지 않은 금사빠로서 선호의 마음이 달리는 속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그냥 이렇게 사는 거다. 짝사랑마다 의미를 부여하면 프로가 아니다.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을 품어본 '프로 짝사랑러'로서 선호의 취향에 대해서도 조금은 가벼운 시야로, 그리고 그 범위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넓혀보는 걸 추천하고 싶은데, 이건 너무 미봉책이겠지?




이전 11화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36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