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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Nov 19.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38

사랑과 우정 사이 04

선호의 부모님은 사이가 좋으셨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시절에도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았다. 선호는 막내였고 청일점이기도 했다. 위로 넷이나 되는 누나들 사이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을 법도 한데, 부모님은 하나뿐인 아들에게 많은 관심을 주지 못했다. ccm붐이 일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선호의 어머니는 선호를 낳고도 돌볼 틈이 없었다. 젖을 떼자마자 어린이집에 맡기고 녹음과 워십 활동에 전념했다. 그리고 선호가 집에 돌아오면 주로 누나들이 돌봐주었다.




가장 큰 누나와는 열 살 차이가 난다.

그 아래로는 맏이와 두 살씩 터울이다. 그리고 드디어 막내가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점점 자라면서 말을 하고 걷고 의사 표현을 시작하자 누나들이 놀아주었다. 주로 바로 위 누나랑 셋째 누나가 많이 놀아주었다. 누나들은 곧잘 병원 놀이와 미용실 놀이, 학교 놀이와 공주 놀이 등을 번갈아 했다. 그때마다 선호는 환자 역할과 손님 역할, 학생 역할과 시녀 역할 등을 떠맡았다. 누나들은 갑이었고 선호는 을이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놀이에 끼워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선호는 주어진 역할에서 필요한 정서를 담아 적절한 대사와 연기로 놀이에 몰입했다. 어차피 아무도 로봇 놀이에는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사다준 구급차는 병원 놀이에 전시용으로 동원되었고, 로봇은 공주를 지키는 호위병으로 뚱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누나들을 탓할 순 없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귀찮은 동생을 놀이에 편입시켜 적당한 역할을 주고 순복시킬 수만 있다면. 부모님이 보기에 선호가 그렇게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선호 자신이 그런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누나들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놀이가 좋았고 서툴지만 누군가를 돌보는 놀이 속 언어들이 선호를 키웠다.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것도, 돌보는 일을 하는 것도 다 좋았다. 누나들과 놀다 보면 누나들의 친구들과도 놀게 되었다.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블록을 쌓고 공룡을 멸종시키고 경찰차나 로봇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보다 머리핀을 꽂고 드레스를 입고 다소곳이 차 마시는 시늉을 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현실적이었다.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축구를 할 때, 선호는 역시 누나들이나 여자애들과 옹기종기 모여 공기놀이를 하고 수다를 떨었다.




그게 절대적인 원인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환경이었다고 볼 순 있을 것 같다. 선호는 타고난 남성성을 발현시킬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선호의 남성성은 같이 목욕탕이라도 다니고 운동도 함께 해주는 아빠나 형에게서 자연스럽게 끌려 나오는 것인데, 하나뿐인 청일점 선호 주변에는 남자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빠는 지방 공연으로 자주 집을 비웠고 소중한 막내는 누나들의 중대한 숙제였기에, 남자다움이나 남성으로서의 성적 정체감을 찾아내기도 전에 선호는 미운 오리 새끼처럼 여성을 흉내 내며 자랐다. 그리고 여성의 정체감이 깊이 새겨졌다. 자신과는 달리 남성성이 강하게 잘 자리 잡은 남자애들이 부러웠고, 두려웠다. 그들을 동경하면서 동시에 피하고 싶었고, 그렇게 멋진 남성이 되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았다.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여성의 행동 방식이 훨씬 몸에 잘 맞았다. 그러다 어느덧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억지로 되짚어보지만 누나 많은 집 애라고 다들 이러는 건 아니니, 어차피 답은 모른다. 모든 사람은 통계 밖에 있다. 그저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사람을 좋아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알아요."

"남자냐 여자냐도 중요한 건 아니고."

"......"

"익숙함의 차이를 곧잘 선호도의 차이로 착각할 수 있어. 넌 여자들이 네게 익숙한 것이지, 그래서 설레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고. 남자들을 보면 조금 긴장이 되지. 덜 익숙하니까. 그 긴장을 설렘으로 착각할 수도 있고. 긴장 자체가 주는 묘한 느낌이 있거든. 그걸 의식하면 뭔가 특별한 감정처럼 여겨질 수도 있어."

"그건 쌤 생각일 뿐이죠. 그냥 취향을 존중해주시는 편이 전 더 편해요."

"동성이 네 취향인지 그걸 어떻게 알아?"

"왜 몰라요?"

"여자랑 제대로 안 사귀어 봤잖아, 사실. 아직 넌 어려. 성적 취향을 논할 나이는 아니야."




청소년 시기에는 아직 정체성이 모두 진행형이다.

성 정체성뿐만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 종교적 정체성, 직업적 방향성 등등을 하나하나 찾고 쌓는 과정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규정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저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을 쌓아가며 하나의 일관된 모양을 서서히 빚어나간다. 여러 갈래로 기웃대고 제자리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며 내적 통합으로 나아간다.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혹은 '나는 이런 방향을 지향하고자 하는구나.' 하고 자신을 발견하고 때로는 스스로 가지를 쳐나간다. 선호는 그런 시기에 어떤 길 위에 잠시 들어서서 기웃대고 있을 뿐이다. 그 길 끝까지 가본 적도 없다.




"너 자신에게 집중해, 선호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처음부터 내가 했던 얘기잖아.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 집중해 보라고."

"누굴 좋아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아니, 그냥 너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말이야. 말 그대로야.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너는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심심할 땐 뭘 하면 좋은지, 어떤 음악이 듣기 좋은지, 이런 것 말이야. 너는 어떤 아들이 되고 싶은지, 어떨 때 부모님이 생각나고 보고 싶은지, 이런 것들 말이야.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나'에 대해서. 내 안에 쌓아 올릴 '나'에 대해서 집중해 보라고. 이해되니?"

"좀 어렵긴 한데, 좀 알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개념이네요."

"응. 정체성이란 건, 결국 개념 싸움이니까. 너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제대로 된 개념을 하나씩 만들고 정리해보라고. 감정에만 쏠려서 취향 타령만 하지 말고. 야, 막말로 남자랑 사귀어 봤냐? 성적 접촉이라도 해봤냐? 취향은 무슨 취향? 아무것도 모르면서."

"흠, 하긴 그건 그래요. 쌤 말대로 여자가 편하고 그렇긴 한데, 나 자신도 잘 모르는지도 몰라요."

"응, 도망 다니거나 불편해하지도 말고, 의식하지도 말고, 그냥 너는 너 자신에게만 집중해. 지금은 그게 필요해."

"네. 노력해볼게요."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외모였다.

선호는 동그스름하던 머리를 짧게 쳤다. 이건 '잘랐다' 정도가 아니라 정말 '쳤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아주 많이 짧은 스포츠형 머리. 애가 확 달라보인다. 부들부들하던 분위기가 쌩 소리가 나게 날카로워졌다. 아이들은 모두 환호했다. 순딩이가 섹시남이 되었다며 다들 호들갑을 떨었다. 뭐, 꼭 그렇게까진 아니어도 확연히 남성성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짧아지니 시커먼 구레나룻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생겼던 선호, 그간 참 착한 얼굴로 살아왔던 거구나. 꽤 잘 어울린다. 아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아 자기에게 꽂았던 것처럼 선호는 자기 자신에게 꽂혀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인지 다음으로 변화를 보인 건 성적이었다.

물론 전에도 상위권이었지만, 악착같이 1위를 해보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별로 공부를 잘 하는 학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문계에서 내신이라도 잘 받아 수시에서 억 소리나게 해보겠다는 야심찬 아이들이 몇 있었다. 그들끼리의 경쟁이다. 그간 선호는 시험기간이 되면 다른 아이들의 질문을 받거나 함께 퀴즈처럼 떠들며 공부하느라 바빴다. 혼자 조용히 공부하기보다는 친구들에게 가르쳐주고 이해시켜주고 그들의 공부를 확인해가면서 자기 공부를 해나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랬던 선호가 이번엔 친구들 사이에서 내신 쪽집게 역할을 내려놓고 혼자 조용히 공부했다. 그리고 압도적인 점수차로 당당히 전교 1위를 차지했다.




"어때? 할만해?"

"네, 쌤. 의외로 좋은데요?"

"너 자신이 좀 사랑스럽냐?"

"그럼요. 저 좀 멋있지 않아요?"

"응, 멋있다. 그놈보다 더 멋있네."

"꼭 그런 건 아니더라도, 쌤 말대로 했더니 마음이 좀 편해지긴 했어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면 돼.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를 존중하라는 뜻인 거 알지?"

"알죠. 그래도 하루 아침에 뭐 다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렇겠지. 그래도 시작은 해보는 거지. 잘난 놈들 쳐다보지 말고, 가 그냥 잘나버리면 되는 거지."

"근데 여전히 의식되거든요. 오히려 더 어필하게 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사랑도 많이 받아봐. 여자애들한테서 인기도 다시 누려보고. 점점 다른 생각들이 들지도 모르지. 넌 아직 늘 ing라고. 알았지?"




선호와 함께 고민하면서 나는 공부를 좀 했다.

공부라고 해봤자, 책과 인터넷이 전부이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을까 하여 열심히 찾아본 것이다. 사실 전문가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으니, 혼자 해볼 수 있는 것이라도 해보는 수밖에. 그렇지만 내가 공부한 것이 어쩌면 편협하고 깊이가 없어서 '카더라'식 정보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그런 지식 나부랭이가 선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내가 어설프게 잔소리하거나 고개를 끄덕여주면 똑똑한 선호는 더 이상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교사로서 참 많은 한계를 느낀다. 교사라고 해봤자 교과나 가르쳤지, 인생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른다. 아픈 건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 어차피 나는 문제 해결사가 아니다. 

들어주고 손잡아주고 일으켜주는 것, 여기까지가 내 몫이라면, 오늘도 난 대나무 숲이 되어 기다린다. 너 자신에게 집중한 너의 방문을, 선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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