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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Nov 22.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40

두 얼굴의 사나이 02

"저를 남자라고 생각하셨던 거요."

완전 뜨끔했다. 뭘 또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그때 사과했잖아. 하긴 사과했어도 여전히 내 마음이 뜨끔한 건 뭔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게 뭘까? 내가 너에 대해 몰라서인가?

"으응? 아, 그러게, 또 미안하네."

"저도 알아요, 제가 남자 같이 생긴 거."

"아, 아니, 아, 아냐, 음, 자세히 보면 은근히 섬세하게 생겼어, 음, 그러니까......"

"병이에요. 저 남성호르몬 과다분비에 관한 병이요."

그랬구나, 여자애치곤 너무 남성미 넘쳐서, 오해한 것이 너무나 미안함에도 불구하고 내 시신경은 자신의 결백을 자꾸만 주장해서, 기다렸지만 갑작스러운 이 만남이 영 어색했던 나는 그제야 약간의 죄책감에서 놓여나는 걸 느꼈다.

"왜 그런 병이 생긴 거시여? 요즘 환경 호르몬 영향 때문에 성 호르몬도 엉망진창이라던데, 그런 건가?"

"딱히 원인을 '이거다' 할 순 없고요.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친 것 같기도 하고요."




가장 큰 원인은 으흠, 이건 아무래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그래도 굳이 꼽자면,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물론 운동 많이 한다고 다 그런 병에 걸리는 건 아니다. 운동을 많이 하면 내분비계 호르몬인지 난소 어디인지에 에너지가 부족해서 배란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단다. 온유는 중학교 때부터 역도를 했다. 체격과 힘이 남다른 온유를 보고 코치 선생님이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곧장 제의를 했는데 온유도 공부보다는 운동이 더 매력 있게 느껴져서 역도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운동은 물론 고되었고 선수 생활은 거칠었다. 코치 선생님은 철저히 성별 무관 평등한 훈련을 추구하셨고 하루 여덟 시간 남짓한 강도 높은 운동을 견디며 올림픽 꿈나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월경이 끊어지고 점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운동은 분명 꾸준히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혹여 대회 때마다 지속적으로 생리를 늦추는 호르몬제를 복용해서 그런 건가 싶어 걱정이 되었으나 그런 부작용은 흔히 나타나는 일은 아니다. 점점 심란해지고 운동도 재미가 없어졌다. 건강을 잃어가면서 모든 것에서 의욕을 잃었다.




그리고 음주와 흡연의 길에 접어들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그 사건이 먼저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운동을 그만둘 무렵, 남성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었고, 그 무렵 음주와 흡연도 시작했으며, 그 무렵 그 사건이 있었는데, 뭐가 어찌 되었든 그 사건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고통과 의욕 상실의 가장 큰 계기였다. 온유의 아버지가 감옥에 가게 되었다. 음주운전으로 크게 사고가 났다. 상대방은 합의해주지 않았다. 뭐라고 감싸 보려고 해도 사실 중대 범죄가 되었다. 왜냐 하면 이미 수차례 음주운전 사고 경력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PC방에 컴퓨터를 공급하고 유통하는 사업을 했다. 사업상 접대하는 일도 흔했고, 워낙 술을 자주 마시기도 했다. 가족들은 불안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난 것에 대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벌금으로도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직 감옥에 계신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상처를 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온유는 그 뒤로 되는 대로 그냥 막살았다.




그래도 딱 한 가지 의욕을 갖게 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교도소에 관한 것이었다. 그곳 환경이 얼마나 혹독한지, 혹은 얼마나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 그 환경과 프로그램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술 때문에 사고 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을 갱생해낼 수 있는 곳인지, 모든 것들이 다 궁금했다. 겨울엔 얼마나 추운지, 여름엔 얼마나 더운지, 밥은 어떤지, 책 읽을 시간은 있는지, 운동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이상한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더 나빠지는 건 아닌지, 모든 것들이 다 걱정이 되었다. 강도나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회를 어지럽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준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과연 그들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 다 차치하고라도, 아버지는 과연 달라질 것인가?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고, 멋쟁이 중의 멋쟁이였던 아버지, 하지만 이젠 전과자로 돌아오게 될 아버지, 들끓는 교도소에 대한 관심과는 달리 서서히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아버지.




올림픽 꿈나무가 망가졌다.

운동은 접었고 몸도 엉망인 데다가 음주 흡연이 시작되고 삶의 갈피를 못 잡는다. 가뜩이나 사는 것도 귀찮은데, 그 와중에 담임이라는 자는 개학 첫날부터 성별도 못 알아본다. 생각할수록 미안하네. 담담하게 남의 얘기하듯 읊조리는 온유는 그 차분한 말투처럼 걸음도 점점 느려진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어떤 뜻일까? 어찌 되었든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나는 좀 물어보고 싶다.

"지금 그럼 돈은 누가 벌어?"

"엄마가요. 그동안 우아하게 브런치 먹고 코치가 가자는 대로 전지훈련 따라다니며 한우 사대던 여자가 밥벌이하려니, 우리 엄마한테는 날벼락이죠. 그래도 은근히 잘 나가요. 보험 회사 다녀요."

"운동은? 이제 정말 미련 없어?"

"엄마는 다시 하자고 하는데, 엿 같아서 못 해 먹겠어요. 갈수록 선배들 얼차려도 더 심하고."

"아직도 그런 게 있어?"

"몰라요. 우린 좀 있어요. 대회도 코치한테 잘 보여야 제대로 들어가고."

"그렇구나. 아버지 면회는 가봤어?"

"못 가요. 엄마가 안 데려가요. 아버지가 절대 안 만나줄 거라고."

"그래, 아버지도 괴로우시겠다. 에휴, 그런 모습 서로 안 보는 게 나을지도 몰라."

"쌤, 그래서요, 제 얘기의 핵심은, 학교를 다닐까 말까, 이제 어떻게 할까, 이런 거예요."

"헐, 야, 개인사 좀 괴롭다고 학교 졸업 여부를 놓고 갈등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다닐 이유도 없는데, 진짜 고달파요, 쌤. 우리 집이 얼마나 먼 지 아세요? 저 한 시간씩 걸려서 와요."

"응, 대견 대견. 이왕 1년 잘 다녔으니 남은 2년도 무념무상으로 그냥 다녀. 졸업하고 생각하자."

"졸업, 그건 해야죠. 그래서 그냥 검정고시도 생각 중이에요."

"야, 은근 공부해야 돼. 고졸 검정고시는 그냥 되는 줄 아니?"

"저도 맘먹고 하면 해요, 공부."




종종 이런 애들이 있다.

고졸은 해야겠고, 학교는 못 다니겠고,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게 검정고시. '그거 어려운 거 아니라더라.' 하며, 그냥 접수하고 앉아만 있으면 합격할 것 같이 쉽게 여기는데, 인생 편하게 살고 싶은 아이들의 망상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굳이 '고졸'이 필요한 건 또 뭐야? 살 의욕도 없다는 녀석이, 거참 신기한 일일세.

"고졸은 왜 해?"

"쌤, 그건 그냥 기본이죠. 이유가 어디 있어요? 앞으로 뭐라도 하고 먹고살려면."

"뭐하고 먹고 살 건데?"

"글쎄요. 경찰? 검사? 몰라요, 범죄자들 때려잡고 교화시키는 일 같은 거?"

이 아이는 센 포스에 비해 마음이 참 여린 것 같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애증을 동시에 느끼며 흔들리고 불안해하는 걸 보니. 하긴 부모라는 존재가 그렇다.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시시각각 그 과정이 과거가 되어 영혼에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꺼져버린 인생에 그래도 한 줄기 남은 가녀린 분노, 그게 '먹고 살' 이유라도 되어 주는 것 같다. 이걸 안심해야 하는 건지, 속상해해야 하는 건지.




그러니까, 지금 온유는 마지막 고비를 넘기기 위해 나에게 왔다.

자퇴 처리해달라, 아버지가 감방 갔다, 몸도 이 지경, 운동도 희망 없고, 이제 내 인생 막차 뜬다, 나 같은 일 겪어 냐, 안 겪어봤으면 말을 하지 말라, 나 겁나 불행하다, 제발 냅둬라, 나도 고달프다, 서로 좋게 처리하고 해결하자, 뭐 이런 거지. 그래도 '한 가닥', 나는 그런 걸 놓치는 법이 없다.

"범죄자 때려잡고 교화시키는 일?"

몸이 안 좋다고는 하는데,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반삭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걸어 다니는 모습은 누가 봐도 마동석 급. 남성 호르몬이 문제이긴 한데, 꾸준히 치료하면서 몸 만들고 저런 포스로 여자 형사라도 하면 폼 날 것 같다. 아니면, 교도소에 관심이 많으니, 교도관 같은 거? 교도관도 재소자들 교화시키는 일을 하지 않나? 오홍, 교도관 어떨까? 뭐든 하나 던져주려는 이 직업병. 호락호락 자퇴서에 도장 찍어줄 내가 아니지.




온유는 피식 웃었다.

"쌤, 하여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요, 쌤. 에휴, 우리쌤, 혹시나 하고 왔는데, 역시나."

"응? 뭐야, 싫어? 아니, 생각해 보라는 거지, 너 아직 18세야, 갈 길 시원한 18세라고!"

나도 모르게 '18세'에 힘이 들어가 욕사발 날리는 기분이 든다. 온유는 또 웃는다.

"아, 쌤, 자퇴서 바로 써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이야기 듣고 이렇게 상쾌하게 마무리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오케이, 고민 좀 해볼게요."

"오옹, 그래? 안 그래도 네 글 잘 읽었어. 꽤 잘 썼더라고. 평소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했지.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래서 나도 생각이 났어."




어쩌면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경쟁률 치열한 공무원이라 마음먹는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온유에게는 작은 그 불씨가 전 생애를 불태울 수 있도록 바람을 불어넣어 줘야 할 때이다. 이 철없는 놈들, 무작정 학교 그만둘 궁리만 하지 말고, 제발 이 제도권의 궤도 위에서 달려갈 길들을 찾아가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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