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사나이 01
선호 이야기를 하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선호와는 어떤 면에서 딱 그 대척점에 있는 아이. 이름은 한온유. 늘 느끼는 거지만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중에서도 특히 어떤 부류로도 그루핑이 불가능한 독보적인 존재이다. 처음엔 압도적인 존재감에 주변 아이들이 모두 위축되었고, 나 역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그 아이의 아우라에 순식간에 눌리고 말았다. 저 아이는 대체 뭐지? 2회 차 인생을 사는 것 같은, 세상 다 아는 것 같은 얼굴 표정. 모든 일에 일말의 호기심도 없어 보이는 심드렁한 눈빛. 그런 아이가 의외로 글을 참 잘 쓰다니.
아니, '그래서'라고 해야 맞는 건가?
너무 인생을 잘 알아서, 그래서 글을 잘 쓰는 건가? 이 학교가 그렇게 학문적인 편은 아니란 걸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글을 잘 쓰는 아이를 발견한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인문계열에서는 종종 조리 있게 자기 생각을 정리해나가는 아이들이 없지 않지만, 특히나 성적은 강 건너에 두고 돌아오는 배를 불태운 것 같은 온유의 수업 태도에 비해 글은 너무나 정직하고 진지했으며 날렵했다.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전개와 그 안에 담긴 강직한 결의가 무척 인상적인 글이다. 어쩐지, 좀 졸다 깨도 내가 던지는 질문에 곧잘 대답하던 기가 막힌 센스라든가, 가끔 이전 수업이었던 과학이나 수학 시간에 꺼내어보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같은 소설이 종종 내가 수업 들어갈 때까지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걸 생각해보면, 이 정도 글솜씨가 영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다.
글의 주제는 '복지'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 복지가 필요한 영역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보고, 그 이유와 함께 구체적인 복지 정책을 제안해보는 글쓰기였다. 물론 가볍게 쓸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 못해낼 만큼 어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사회에 조금씩 다가가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세상을 준비해 가는 시야를 갖추도록 한 번쯤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수업은 이래서 참 좋다. 교과 연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의 가치관을 매만지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주체적인 준비를 해나갈 수 있도록 건드려볼 수 있다는 점. 대체로 아이들은 장애인의 편의에 관한 것, 고령화 사회에 노인의 고용에 관한 것, 난치병 환자에 관한 것 등등 다양한 소재로 복지 문제에 관해 고민하며 글을 써 내려갔다. 좀 뻔하기도 했고, 역시나 수준이 얕을 수밖에 없었지만 의도했던 대로 아이들은 조금이나마 복지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찾아볼 기회를 얻은 것 같다.
그런데 온유의 주제는 좀 남달랐다.
복지의 분야가 뜻밖에도 '교도소'였다. 으잉? 왜? 갑자기? 무엇? 일단 호기심을 확 당긴 서론, 그리고 교도소의 복지 현황에 대해 조사한 자료 남발, 따라서 교도소의 복지 개선 방안 원 투 쓰리, 그리하여 결론은 복지 제대로 해달라, 교도소에도 사람이 산다. 이렇게 끝맺은 글. 정말 개요만 봐도 잘 쓴 글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게다가 독보적인 주제, 참신한 결론, 물론 나는 글을 다 읽자마자 섬세하고 치밀한 분석으로 항목별 평가 요소들을 잘 적용하여 채점하려고 애를 썼으나 딱히 문제 삼을 것이 없었서였는지 그냥 확 설득당해서였는지, 그 자리에서 'A'를 주고 말았다.
물론 궁금했다.
남들과 전혀 다른, 나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에 관심을 가진 온유의 의식 세계에 관해서. 그리고 공부 쪽 머리는 나쁜 것 같지 않은데 별로 공부에는 관심 없는 이유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그 아우라의 정체에 대해서. 어차피 한 번쯤은 상담을 하게 될 터이나, 가나다 순으로 된 학생 명렬표에 의하면 한온유는 맨 끝번이라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순서를 무시하고 만날 기회가 왔다.
"쌤, 시간 되세요?"
"어, 지금?"
"아, 지금 되시면 더 좋고요."
"으흠, 그래. 왜? 근데, 여기서?"
난 그때 급식실 앞에서 질서 지도를 끝내고, 마침 밥을 먹고 나오던 우리 반 헬스맨에게서 스쿼트 자세를 교정받던 중이었다. 급식실에서 무리와 함께 나오던 온유가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벌서듯 두 팔을 들고 용쓰는 나에게 그런 식으로 훅 다가와 말을 걸게 될 줄은 몰랐다.
"길어? 짧아?"
"글쎄요. 일단은 잠시만요."
온유를 따라 나오던 일행들은 가버리고 온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 고유의 자세로 건들거리며 내 옆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반의 아이들을 만났던 개학식 날부터 내가 실수한 바 있어서 이런 상황이 못내 어색하다.
"얘들아, 여기 남자애들 몇 명만 따라와 주면 안 되겠니?"
"......"
"어이, 잘생긴 오빠들!"
아이들은 담임이 이 학교 최고 센캐인 김은희, 바로 나라는 사실에 매우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침 조회 겸 담임 인사 시간으로 들어갔던 1교시를 마치고 2교시 개학식 준비를 위해 방송실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 반이 들고 날라야 할 책걸상을 옮기기 위해 아이들을 불렀을 때, 아직 멘탈이 털린 우리 반 아이들은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2학년 2반, 정신 차리고, 거기 뒤에 모여있는 놈들, 이리로 다 튀어와."
그러자 지목당한 아이들 뭉텅이가 우르르 달려와 책걸상을 나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아직 멍하게 턱을 괴고 앉아있는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온유였다.
"넌 뭐야? 빨랑 안 와?"
"저요? 제가 왜요?"
"됐다, 됐어.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으이그."
나는 살짝 뿔이 났다. 담임이 도와달라는데,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나? 내가 담임인 게 뭐 그렇게 싫은 건가? 아니면 센캐라는데 어느 정도인지 간이라도 보려는 건가? 바빠 죽겠는데, 에잇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왜요? 제가 왜요? 덩치도 산 만한 놈이, 남자애가 말이야, 넘쳐나는 힘 좀 나눠 쓰자는데. 투덜대며 낑낑거리며 책상을 들고 가는데, 온유가 와서 덥석 책상을 붙잡았다.
"도와는 드리는데요, 쌤. 남자애들 오라고 하셨잖아요."
"어? 어. 고마워. 어? 어. 어?"
"참 나, 쌤. 저 여자거든요. 하긴."
온유는 참으로 놀라운 아이.
스포츠로 완전 삭발하다시피 한 짧은 머리. 거의 마동석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큰 몸집. 교복 대신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에, 트레이닝 후드 점퍼. 주머니에 손 넣고 옆으로 한번 째려보면, 어휴, 나도 모르게 쪼그라드는 이 포스 어쩔 거야? 그런데 어떻게 이런 외모가 여자라는 거지? 다시 봐도 잘 모르겠는데? 작년 희수에 이어 난 또 성별 놓고 실수하는 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긴장이 바짝 되었다. 아이들 파악하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또 외모만 보고 성별에 대해 내 고유한 편견으로 그냥 '너처럼 생긴 애는 남자애'라고 정해놓고 대했나 보다. 그때 괜찮다고 혼자 하겠다는 온유를 마주 보고 엉거주춤하게 책상을 맞잡은 채, '미안 미안'을 반복했던 것이 생각나서, 오늘 갑자기 이렇게 온유랑 나란히 걸으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과연 오늘 이 아이가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급식실 앞에서 놀던 나를 순식간에 낚아채어 으슥한 곳으로 걸어가는 아이. 그래, 듣고 싶은 이야기가 왠지 많은 것 같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온유. 나 하나도 안 무섭거든? 으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