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사이 02
선호는 이 학교에서 보기 드문 모범생이다.
예의도 바르고 성격도 사근사근하다. 여기서는 인성이 갑이다. 사실 공부는 그다음이다. 내가 얘기했던가? 이 학교는 4개의 인문계열과 8개의 특성화계열로 학급이 구성된 종합고등학교라고. 작년에 부임했을 때 1학년 특성화 학급을 맡아 고생 진탕 하고, 올해엔 어엿하게 2학년 인문 학급을 맡았다. 그 얘기도 했던가? 이 학교는 주먹 세계에서 전국 최상위, 학업 세계에서는 전국 최하위의 성적을 달린다고. 인문 학급이라고 해봐야 그렇게 딱히 대학에 크고 원대한 소망을 두는 편은 아니란 말씀.
그래도 공부라는 걸 하려는 아이들이 있다.
꼭 백 퍼센트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공부에 조금이나마 뜻이 있는 아이들은 예의라든가 최소한의 사람됨에도 조금은 뜻이 있는 편이다. 공부 잘하는 놈은 착한 놈이라는 무식방자한 등식을 주장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공부에 신경 쓰는 놈은 그래도 수업에도 신경 쓰는 놈이고, 수업에 신경 쓰자면 선생님 이야기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선생님 이야기에 신경 쓰자면 선생님과의 관계성에도 무관심할 수 없고,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사회성이 어쩔 수 없이 학교 생활 성실도와 연관 있고, 그 성실도는 학업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론 공부밖에 모르는 불쌍한 중생들의 인성은 여기서 논외. 어느 쪽이나 균형이 필요하다. 내 말은 이렇게 공부와 동떨어진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아이들의 성적은 인성의 점수와 어느 정도 비례한다는 점. 장황한 이야기였지만, 결론적으로 선호는 학업 성적도 인성도 참 우수한 편에 속한다.
시험 기간이 되면 모두 선호의 노트를 빌린다.
남자애치곤 참 꼼꼼하고 성실한 필기 내용. 한눈에 정리되어 보기 좋은 노트. 내게 이런 친구가 있다면 정말 두고두고 좋을 것 같다. 내 이야기 다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착한 남사친이라니. 그래서인지 선호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인기라는 것이 '남자'로서의 인기는 아니었다. 아무도 남자애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선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냥 편하게 수다 떨고 어디든 같이 다니는 다정한 친구로 선호를 호출했다. 그러고 보니 선호에게는 남자인 친구들보다 여자인 친구들이 더 많았다. 신기할 정도로 선호는 오직 남사친의 포지션에 찰떡이었고, 선호 자신도 그 선을 철썩 같이 잘 지켜냈다.
중학교 때 여자 아이를 사귄 적이 있다.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선호, 섬세하고 스위트 한 말투와 분위기, 요즘 애들 같지 않은 차분함, 욕설도 쓰지 않고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모습, 그 여자애는 그런 선호가 참 좋았다. 선호는 자신을 너무나 좋아해 주는 그 여자애의 마음이 아플까 봐 거절하지 못하고 남친이 되어 주었지만, 그 관계가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여자애가 여자애의 남친이 되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어떤 날은 여자애의 투정이 짜증 났고, 어떤 날은 갑자기 손을 잡거나 뽀뽀하는 것이 불편했다. 친구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여자애에게 어설픈 남친 놀이는 더 이상 못해먹겠다 싶어서 그만뒀다. 아무리 예쁜 여자애를 봐도 설레는 법이 없다. 중증이 아닌가, 스스로 고민이 많이 되었다.
선호의 아버지는 기타리스트였다.
주로 음반 세션으로 연주했다. 어머니는 ccm 작곡가였다. 몇 곡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두 분은 음악으로 맺어진 사이였고 지금도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찬양 예배를 인도하거나 녹음 작업을 진행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항상 선량한 웃음과 따스한 손길로 이웃들을 돌보고 언제 어디서나 저런 분들이 부모님이라는 사실이 참 자랑스러운 분들이었지만, 그럴수록 선호는 마음이 더 무겁고 그늘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 신은 나를 만들 때 뭔가 실수를 한 것만 같다, 부모님은 저렇게 깊은 신앙으로 더 나아가는데 나는 나날이 죄책감만 더해가고 있다, 난 실패작이다.'하고.
그렇게 점심시간에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울었던 선호.
다음날은 더 우울한 얼굴로 나타났다. 아무래도 그냥 어제 하루 잠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고 대나무 숲의 문을 닫아버리기엔 왠지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오늘 하루 더, 나는 대나무 숲이 되어야 할 것 같다.
"학교는 무슨 재미로 다니니?"
"학교는 그냥 다니는 거죠, 재미없어도요."
"그래, 재미가 아니어도 목표는 있겠지. 넌 뭐가 되고 싶냐?"
"이런 질문 오랜만이에요, 쌤."
"그래, 어렸을 땐 더 자주 받았을 질문인데, 그치?"
"그런가요? 전 뭐가 어울릴까요?"
"음, 진짜 내 맘대로 얘기해도 돼?"
"오호, 뭔가 있나 보네요, 쌤. 뭔데요?"
"음, 다정하고 마음 씀씀이도 따뜻하고, 유니세프 같은 곳은 어때?"
"네에? 아휴, 아니에요, 저 그렇게 안 착해요."
"뭐, 착해야 하는 일인가?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되는 거지."
"아니에요, 쌤. 실은 저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오호, 그래? 왜?"
"전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이 잘 맞는 것 같아요."
"것 봐, 보살피는 일! 유니세프 각이라니까."
"의료 서비스가 더 폼 나잖아요. 이왕이면, 의료진이 되고 싶어요."
"좋아, 그럼, 의사는 안 돼?"
여기에서 또 내 망할 편견이 스물스물.
보통 남자애들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편이라는 편견, 간호사는 여자애들이 더 많이 찾는 직업이 아닌가 하는 편견. 이미 직업적 성 차별이 무너진 세상에서 나는 아직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만나고 있으니 큰일이다. 서둘러 내 맘대로 구분 짓는 의식의 흐름을 재빨리 차단해버렸다. 남자 간호사가 아픈 날 돌봐준다면 오히려 더 든든할지도 모르겠다. 교사도 남성이 확연히 적어서 아이들의 정서에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는 문제의식도 많은데, 남자 간호사라니 쌍수 들고 환영해야지, 아무렴.
"쌤, 저 생각보다 현실적이거든요? 우리 학교에서 무슨 의사예요? 제 성적에 간호사도 될동말동인데."
그렇다. 사실 의사보다는 간호사가 어쩌면 '보살핌'이라는 업무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아닌가? 어찌 되었든 성적으로 볼 때 의사는 어려운 게 사실이고. 으흠, 남자애치곤 너무나 다정 다감 섬세 꼼꼼한 선호. 과연 간호사가 참 잘 어울린다.
사실 성품은 다양하다.
어떤 모습이 여성적 성품이라든지 남성적 성향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고, 성별은 인격의 한 부분일 뿐 한 인간의 전체를 대변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젠더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성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청소년기에 몸과 마음에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온갖 성징들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적 정체성에 관한 고민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한 매우 중요하다. 본인이 점점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 남성으로서 여성으로서 준비되어 가고 있구나, 하고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고 더욱 소중히 아껴야 할 때이기에, 성적 정체감이 주는 만족과 기대감을 충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곧 정서적 안정감과 자존감으로 이어질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좀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타고난 생물학적 성별이 자신에게 익숙해서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최선이라는 고지식한 신념이 잘 깨뜨려지지 않는다. 인권이란 참 소중하고 인간의 다양성 역시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성적 지향성으로 인해 차별받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방향성에 대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옳다, 혹은 좋다, 하는 판단보다는 적어도 '기준'에 관해서 말이다. 아이는 아이의 생각을, 어른은 어른의 생각을 하는 것처럼,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서의 정서를 갖는 것. 어린아이가 애어른 노릇을 할 수도 있고, 어른에게도 역시 아직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지향점이나 기준만큼은 있지 않느냔 말이다. 역시 보수적이라든가 전근대적이라고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다. 원래 교육은 보수의 기반 위에서 진보의 깃발을 바라보는 일이니까.
내가 꼰대가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무정부 상태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어떤 생각도 들어주지 않고 각자만의 세계에서 머리 쥐어뜯다가 문득 문 밖에서 마주친 눈빛에서 외계인을 보게 되는 것보다는, 뭐가 되었든 같이 고민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비록 내 안에 답이 없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