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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Oct 31. 2021

[#연재 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31

독립 만세 02

아무래도 꺼림칙하긴 하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독립과 가출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결론은 둘 다 집에서 떠나는 것이기에. 어떤 형태의 독립이든, 그 나이엔 그저 가출에 지나지 않는다. 독립을 하고 싶다는 얘기는 다시 말하자면 가출 욕구에 시달린다는 뜻이 된다. 집을 나가고 싶다는 건 집이 싫다는 것이고, 집에 있기 싫은 이유는 대체로 가족 문제일 것이다. 특히 거부할 수 없는 대상은 주로 부모가 아니겠는가? 독립에 미친 듯한 열정을 가지고 내게 입덕한 민지는 결국 집이 싫고 부모가 싫어 미칠 지경이라는 걸 누구나 눈치챌 수 있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또 독립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딱 싫은 거다, 부모가.




이런 경우,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다.

그게 아이돌 오빠가 되었건, 그럴듯한 롤 모델이 되어줄 교사가 되었건, 적당히 덕질을 하며 사랑과 고통의 욕구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 그건 매우 건강한 방식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건전한 방식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엉뚱한 남자애에게 빨대 꽂고 쓸데없이 깊은 연애로 인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아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제이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학교에서는 잠시나마 민지의 감정 소비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역시 귀찮은 건 사실이다.

난 정말 만인의 연인이긴 하니까. 우리 반이 아니어도 아이들은 수시로 나를 찾거나, 내가 알 만한 누군가를 찾기 위해 나를 찾거나, 사건 사고 속에서 나를 찾았다. 의외로 나는 늘 바빴고, 수업 준비와 평가와 상담과 각종 민원 해결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그래서 내 몸값이 좀 더 뛴 것 같다. 민지는 올 때마다 자리를 비워대는 나를 찾고 기다리다 약이 올라, 나를 만나면 더욱 격하게 반기고 나와의 시간을 알토란 같이 챙겨 먹었다. 덕분에 평소 높은 텐션과 쓸데없는 진지함으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는 유진이도 덩달아 나의 사생팬이 되어버렸다. 




이럴 때, 교사로서 선을 긋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괜히 '비밀'을 알아버리면 더욱 그렇다. 나는 그걸 꼭 알고 싶었던 건 아니다. 독립에 눈을 반짝이던 날, 민지는 수업 후에 따라온 것처럼 홀린 듯 방과 후에도 또 내게 와서 상담하고 싶다며 한 시간을 울고 그냥 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민지는 계속 들이대곤 그냥 울기만 했다. 사연이 있겠거니 짐작은 했으나, 아무 일도 못하고 우는 아이만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그래서 나는 그냥 편지를 쓰기로 했다. 

'독립'에 꽂혀 막무가내로 따라오기 시작해놓고도 아무 말도 못 하는 아이에게 나의 독립에 얽힌 사연을 편지로 전해주면 어떨까 싶었다. 사실 내 독립은 참말로 어이없게도 어떤 점쟁이의 말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사주에서 엄마랑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가 아이들을 품고 있는 것보다 내보내는 것이 서로 상생하는 길이라고. 그래서 아이 셋 다 서울로 학교를 보내라고. 스무 살이 넘어서도 아이들이 엄마랑 지내면 서로 화합이 되지 않을 거라고. 엄마는 가뜩이나 늦은 사춘기로 고딩 때 시도 때도 없이 발작적으로 반항하는 시건방진 나랑 안 맞는다는 생각에 괴로웠는데, 그게 사주 때문이라는 점쟁이의 말에 무척 안도하며 흔쾌히 나를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비슷한 성적의 지방대가 아니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며 당당히 독립을 선언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겉으로만 독립이지, 실상은 내전이었노라고. 




민지는 뜻밖의 답장을 내게 건넸다.

시작은 엄마의 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남동생은 엄마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다. 초등학생인 남동생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다 이루어지는 환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고, 민지 본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지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새아빠가 생겼다. 새아빠는 차별받는 민지를 더 각별히 챙겨주었다. 밖에서 따로 불러 내어 햄버거를 사주기도 했고, 종종 엄마 몰래 쓰라며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민지의 생부는 민지가 여섯 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그 해에 태어난 어린 아들에게 마음을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그러니 민지 네가 이해하라고, 이젠 이 새아빠가 왔으니 엄마 마음이 좀 나아질 거라고, 그동안 네가 고생이 많았다고, 민지의 노고를 칭찬해주고 위로해주었다. 




새아빠는 엄마의 얼굴에 웃음을 돌려주었다.

유쾌하고 목소리가 큰 새아빠 덕분에 집안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민지의 남동생은 자주 아파서 학교를 한동안 쉬기도 했지만, 새아빠가 적극적으로 밥을 먹이며 신경을 써서 몸무게가 늘었고 다시 학교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새아빠는 제이 오빠 외엔 구원이 없던 민지에게도 따사롭고 희망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쩌면 진짜 아빠가 될 것 같은, 여섯 살 때까지 민지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그림자처럼 스쳐갔던 아빠를 더 이상 부여잡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새아빠에게 민지는 고마움을 느꼈다. 엄마도 더 이상 푸념을 늘어놓거나 심지어 종종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 민지에게 퍼부어대던 폭언도 줄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두 분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어느 날인가부터 새아빠라고 부르라며, 그분이 집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가끔 할머니가 반찬을 챙겨 오실 때면 엄마는 새아빠의 흔적을 지웠다. 엄마 차 트렁크에 새아빠의 옷이나 신발 같은 걸 무차별적으로 쓸어 담아 잽싸게 뚜껑을 닫아버렸다. 눈치껏 민지와 남동생은 새아빠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할머니의 반찬을 받아먹었다. 반대하시는 것인지 아예 모르시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할머니는 새아빠의 존재를 몰랐고 새아빠는 할머니가 오시는 날엔 집에 오지 않았다. 그럴 땐 마음이 착잡했다. 그냥 새아빠를 공개해버리는 게 어떨까 생각도 들었지만, 어른들의 일에 참견할 순 없었다. 그런 날에는 새아빠에게 괜히 괜찮으시냐고 카톡이라도 남겼다. 새아빠는 늘 고맙다고, 괜찮다고, 우리 민지 보고 싶다고 답이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지 엄마가 남동생을 데리고 할머니 댁에 갔다.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엄마는 그날 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민지는 집에서 새아빠랑 단둘이 저녁을 먹었다. 새아빠는 꼭 식사 때 소주 한두 잔을 곁들이기를 좋아했다. 김치찌개를 데워 먹으며 혼자 소주를 마시던 새아빠가 민지에게도 한 잔 권했다. 술은 원래 아빠한테서 배우는 거라고, 한번 마셔보라고 했다. 민지는 웃으면서 새아빠에게 잔을 부딪히고 옆으로 다소곳이 잔을 돌려 마셨다. 새아빠는 술 예절을 잘 배우고 있다고 칭찬해주셨다. 밥상을 물리고 같이 하하호호 드라마를 보다가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민지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민지 엄마와 남동생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민지는 혼자 할머니 댁에 갔다. 그리고 계속 할머니 댁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다시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민지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아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민지는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왜 집에 오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는 것이 더 무서웠다. 오히려 옷과 책을 싸서 할머니 댁에 실어다 준 엄마와 새아빠에게 민지는 똑같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래도 끝끝내 민지는 입을 열 수 없었고, 입을 열어서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만이 매일 쉬지 않고 '미친 년', '미친 놈'을 혼잣말처럼 내뱉곤 하셨다. 




민지는 비록 사회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눈치는 있는 아이이다.

나만 사라지면 된다, 나만 입을 다물면 된다, 나만 아무 일이 없었던 거라고 하면 된다, 나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나만 이상한 거다, 나만 나쁜 거다, 나만 저주받은 거다, 나만 닥치면 세상은 그대로 돌아간다, 난 이미 죽었다, 죽은 채로 살고 있다, 그냥 죽은 거나 다름없다, 죽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죽지? 이제 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죽고 싶다고.

매일 같은 생각의 회로에 갇혀, 민지는 이어폰으로 귀를 닫고 오직 제이 오빠 얼굴만 바라보며 맹목적인 덕질을 산소호흡기처럼 달고 존재하기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그날 밤, 새아빠의 거친 얼굴이 나타나는 끔찍한 악몽에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 일도 없었던 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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