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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웅 Jan 04. 2019

시작도 작게, 끝도 작게

지속가능하게 뭔가 유지하는데 에너지를 더 쏟아보자

2019년 새해가 밝았다. 다들 무엇인가 포부를 가지고 큰 것을 만들어내려 할 것이다. 연초에 헬스장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거나, 해돋이를 보러 인파들이 몰리는 것이 이런 측면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헬스장은 3달을 못넘기고 금연은 1주일을 못넘기며 다이어트는 3일, 나같은 경우 금주는 1일을 못넘긴다. 시작이 반이라고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궁색하다. 원인을 따져볼 것도 없다. 그냥 스스로나 못난거다. 어쩌면 우리는 냉정하게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해서, 나의 ‘사실(fact)’라는 것을 지켜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외부 요인을 붙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스스로를 바라보려면 우선 내가 작다는 것, 그리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씩 바꾸는 마음을 갖는 것이 큰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를 실례로 든다면, 2016년 쓰기 시작한 가계부는 이제 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 데이터에서 나를 이해하고 있다. 1년 전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그 일상을 데이터가 설명한다. 와인 시음 역시 마찬가지다. 2003년 12월부터 쓰기 시작한 시음노트는 15년을 넘겨 올해로 16년차가 된다. 처음에는 정리도 되지 않았고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시음노트 채우려는 욕심에 연간 1,200종 이상을 테이스팅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연간 600~800건 사이를 오고 간다. 단지 멈추지는 않는다. 이렇게 미음완보 하니 올 상반기 중에는 1만개를 넘는게 확실하게 되었다. 


또 하나를 본다면 수입와인시장분석보고서다. 올해부터는 변화를 많이 주는데 별도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이 역시 2013년 1권을 발표한 이후 해마다 발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지는 않으나, 도움을 받았다는 이들의 연락을 받을 때 마다 보람을 느끼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외국에서 매우 면밀하게 보아주어서 해마다 만나서 비공식적으로 별도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처음에 작게 시작하여 서서히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사실 시작은 쉽다. 더 어려운 것은 유지하는 것이다. 유지하는 것은 늘 내가 쓸 수 있는 자원의 일정부분을 나누어두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한 번에 끝나는 일은 없다. 언제나 그 것을 유지하고 일관성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며 지속적 에너지 투입을 요구한다.


불가의 논리에서도 이 관점은 살펴볼 수 있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이 성주괴공(性住壞空)의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처음에 서서히 올라가다가 결국에는 없어진다. 우리가 처음에 큰 것을 이룩하겠다 마음을 먹어도 결국 그 것은 줄어들어 사그러드는 것이 이치다. 처음에 큰 것을 만든다는 생각은 ‘성(물체를 형성)’의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무엇인가 이룩했다면 ‘주(그 형상의 속성을 유지하는)’것이 더 어렵다. IT 서비스를 설계하는 내 입장에서도 고객들에게 자주 설명하는 것이 "구축보다는 구독 방법으로 유지보수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라"고 한다. 이 ‘주’ 과정이 전체 과정의 80%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마음은 다가오는 ‘괴(서서히 부서져 가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괴’가 늦어지도록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괴’는 다가온다. 이 ‘괴’가 다가왔을 때 자연스럽게 ‘공(흩어지고 없어지는)’의 과정으로 넘어가는데 그래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와인에 비유해보면 이렇겠다. 처음에 그 와인을 구하는데 힘을 쓰지만 사실 시음적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어렵다. 셀러가 정전이라도 되지 않을지, 혹시나 누가 와서 몰래 혹은 무심코 셀러에서 와인을 꺼내서 마시지는 않을지, 펜폴즈 그란지처럼 리콜킹 서비스가 있는지 없는지 등등 여러 가지 고민들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주’ 과정을 거치다가 와인을 개봉하기로 마음 먹으면 서서히 그 와인은 사그러들기 시작한다. 병 브리딩이나 디켄팅을 하고, 잔에 따르면 서서히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빈 병에서 레이블마저 떼어내면 그 와인은 ‘공’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와인을 구매하는 이유는 투자 목적을 하는 이도 있겠으나, 대부분 마시기 위해서다. 마시기 위해서라면 그 와인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내려놓고 와인을 바라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좋은 날이 언제일지 고민한다면, 마실 날을 미리 정해두면 좋겠다. 그리고 그 와인을 낼 때 그 와인의 사라짐 자체를 자연스럽게 바라볼 뿐, 그 와인에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뭐라 보아줄지, 나에게 어떤 감사함을 표현할지 등등의 생각도 내려놓는 것이 좋다. 기대치가 있으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지만, 기대치가 없으면 그 어떤 표현도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작도 작게 가고 끝도 작게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에 기대치가 높으면 마지막의 성과와 기대의 간극은 실망이 되고 나에게도 나쁜 영향을 줄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떻게 될까? 가계부는 죽을 때 까지 계속 쓸 것 같고, 시음노트는 어느 시점 되면 게을러져서 쓰지 않게 될 것이며, 시장보고서는 어느 시점에 더 훌륭한 분석력을 갖추고 지속가능성을 갖춘 이에게 넘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는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것을 계속 하고 있을까?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 인생의 경구로 삼는 자주 인용하는 다음의 문장이 그 답을 주지 않을까 싶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마라. 나는 나의 두려운 리듬을 좆아 터벅터벅 따라갈 뿐-니코스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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