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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Feb 03. 2018

내가 아프니 네 아픔이 보인다

"우울증, 번아웃증후군은 기사에 나오는 말인줄만 알았다"

나 일을 쉬게 됐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렇게 일했는데 병이 안 나는게 오히려 이상하지. 잘했다.

휴직 후 처음으로 '내 시간'을 갖게 됐다. 회사를 다닐때도 휴가는 갔지만, '곧 출근'이라는 제한 속 '그러니 소문나게 잘 놀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쉴틈없이 돌아다녔기에 '내 시간'을 가졌는지 돌이켜보면 '그렇다'고 선뜻 답하기 어렵다.


휴직을 마음먹고, 휴직기간을 정하는 유예기간 격으로 대체휴무(주말 근무를 평일 휴무로 사용하는 것, 주말 근무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휴일근무 수당으로 나오지만 그 전에는 대체휴무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상사의 허가라는 제한하에)와 휴가를 붙인 한달을 허락받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10년만에 처음으로 '내 시간'을 가졌다.


무엇을 해야한다는 강박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졸릴때 잤고, 배고플때 먹었다. 책을 보고 싶을때는 도서관으로, 영화를 보고 싶을때는 영화관으로 갔다. '무엇을 하고 싶을때 당장 할 수 있음'이 얼마나 축복받은 행복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우울증, 번아웃 증후군. 기사에나 나오는 말인가 했어


그렇게 2주를 보내고 나니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그동안 진짜 격무로, 때로는 격무에 따른 피로감에 없는 일도 있는냥 핑계를 대며, 인정받고 싶어 친구들과 선약마저 깨고 일을 하던, 그런 내가 힘드니 염치없게도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나 일을 쉬게 됐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렇게 일했는데 병이 안 나는게 오히려 이상하지. 잘했다"


수다의 기본은 '근황토크'가 아닌가. 일단 휴직을 하면 얼마나 좋은지 일장 연설을 했다. 늦잠을 잘 수 있고, (상사가 아닌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싶을때 먹을 수 있다. 멍때리고 싶을때 멍때릴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 상대 역시 사회생활의 고충 등을 토로했다. 최근 휴가 간 이야기나 주변 친구들의 근황 등도 공유했다.


행복한 이야기를 한참을 깔깔거리다 본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그들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 나 너무 힘들다. 그러니 위로 좀 해줄래? "사실은 우울증, 번아웃 증후군 진단을 받고 휴직했어. 그런말, 신문기사에나 나오는 말인가 했는데 내가 그 진단을 받은 사람이 됐네" 피씩 웃음이 났다. 큰 사고나 신변의 변화가 생기면 오는건줄만 알았던 그 병들에 내가 걸린 것이다. '나 아파죽겠는데 니가 좀 위로해주라' 바랐지만, 입밖에 내진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어. 니가 약해서도, 니가 잘못해서도 아니야" 짠듯 한결같이 말했다. 내가 아프니 다른 사람들의 아픔들이 보였다. 말하지 않아서, 아니 내가 관심이 없어서 몰랐지만 거의 모든 이들이 아픔을 갖고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 우울감때문에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파혼을 경험하며 공황장애를 겪은 친구, 2번의 유산을 경험한 친구도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어. 니 아픔을 몰랐어서 미안해


위로 받으려고 만난 이들을 위로하며, 위로 받았다. "얼마나 힘들었어. 미안해. 니 아픔을 몰란던 것, 미안해" 나만 힘든줄 알았다. 나만 하루하루를 간신히 넘기는 줄 알았다. 남들 모두 행복한데 왜 나만, 나만 나약해서 이렇게 아픈지, 상대없는 원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나도, 너도, 우리 모두 나름의 아픔이 있고 이를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위로가 됐다. 어쩌면 '나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10년 전 방영된 드라마 이산(2007, 이병훈 연출)에서 이서진(정조 역)의 대사가 생각났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당신의 아픔을 온몸으로 공감한다는 이 말은 '그냥 드라마 대사'가 아니었다. 네가 아프니 나도 아팠다. 감히 네가 아픈만큼 내가 아프진 않았겠지만, 네가 아팠던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 가슴이 저리고 코끝이 찡해졌다. 그래서 나도 아팠다.


그래도 한가지는 배웠다. 아픔은 말해야 한다는 것. 나눠야 한다는 것. 상대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것, 지지해주는 것. 이것이 아픔을 견디고, 극복하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상처가 아무는 것뿐 아니라, 그 위에 단단한 근육을 만드는데도 도움이 된단 사실을. 늦었지만, 이제야 네 아픔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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