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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웃는 아이 05화

욕하는 엄마 2

by 꽃님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 밭고랑처럼 깊게 파인 주름살, 앙상한 뼈만 남아 수척한 엄마가 앳된 얼굴을 하고 잠이 들었다. 폭풍우가 한바탕 일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지는 바다처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엄마가 그렇다. 가만히 엄마 얼굴을 들여다봤다. 고통이 이성을 삼켜버리고 분노로 뒤덮인 엄마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잠에서 깨어 또다시 폭군으로 변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다.

아빠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소주병을 치우고 계셨다.


"괜찮아...?"


"괜찮다..."


아빠의 괜찮다는 말이 마음을 때린다. 아빠는 힘없이 소주병을 치우다 이내 자리에 앉더니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침에 오빠 방에서 말소리가 들려서 방문을 열었는데..."


아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머뭇 애꿎은 소주병만 만지작거렸다.


"오빠 침대에 앉아서 혼자 뭐라 뭐라 하는 거야. 뭐 하냐고 몇 번을 물어봤는데도 계속 혼자서 말을 하길래. 무슨 말인가 들어봤더니..."


아빠 손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글쎄... 가람아,라고 하면서... 가람이랑 대화하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어느새 아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울컥 쏟아질 것만 같은 감정을 추스르고


"놀라서 나도 모르게 네 엄마를 잡고 흔들며 정신 차리라고 했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나 때문에 가람이가 놀라서 가버렸다고... 갑자기 날 밀치더니 목을 졸랐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빠를 조용히 안았다. 아빠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누구보다 강한 줄 알았던 엄마는 그렇지 못했고 단단하게 버티고 있다고 믿었던 아빠조차 줄 위를 걷는 광대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 모두 다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공포스러운 존재가 돼버리는 것처럼 가혹한 형벌은 없을 것이다. 아빠와 난 엄마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아빠는 끝까지 엄마를 지켜주고 싶다고 했지만 다음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엄마도 아빠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엄마를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엄마 손을 잡고 병원으로 가서 의사 선생님한테 엄마를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전하고 엄마에겐 이곳에서 치료 잘 받으셔야 한다고, 엄마 병 다 나으면 그땐 우리 가족 다 같이 엄마가 좋아하는 바닷가로 놀러 가자고 말하고 돌아섰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엄마의 절규를 뒤로하고 그대로 도망치듯 병원을 나왔다. 처음엔 내 이름을 부르다가 날 원망하는 소리와 저주를 퍼붓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리고 멀리 마지막으로 들린 흐릿한 소리는

잘못했어... 였다.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한다. 나라도 강해져야 한다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난 무너지고 말았다. 모든 게 다 부서지고 물거품이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아 두렵다. 울부짖는 엄마의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달려와 내 심장에 닿았다. 소리가 내 심장을 도려낼 것만 같았다.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횡단보도를 지나 보도블록을 따라 길게 늘어선 가로수가 있는 길을 비칠 비칠 걸었다. 길 잃은 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울고 또 운다. 그런 날 조롱하듯 오늘따라 길가에 벚꽃이, 벚꽃나무들을 비추는 햇빛이 밝고 예쁘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하다. 잠시 멍하니 앉아서 따뜻한 기운을 느껴본다.


"선생님, 선생님?"


지우가 날 불러 정신을 들게 했다.


"으... 응?"


"다 썼어요."


"그래, 어디 볼까?"


지우가 쓴 글은 간결하면서 명쾌하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게 티가 날 정도로 자연스럽게 잘 썼다. 지우는 내가 글을 읽고 첨삭해주길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지만 난 하지 않았다. 잘 썼다고 칭찬해 주고 수업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오전에 일로 몹시 지쳐 얼른 집으로 가서 침대에 눕고 싶었다. 주섬주섬 교재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선생님, 저 오늘 엄마한테 욕먹었어요."


"왜? 뭐, 잘못했어?"


"선생님 오시기 바로 전에 수학 문제를 푸는데 잘 못 풀었다고 이런 것도 못 푼다고 나가 죽으라고..."


"그래?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하셨어?"


"엄마, 원래 그래요. 저한테 맨날 욕해요. 엄마가 하라는 거 잘 못하면 너 같은 거 없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막 화내요."


"지우가 많이 속상했겠다. 엄마도 사람이니까 화가 너무 많이 나면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아닌 가짜 말들이 막 튀어나올 때가 있어. 화가 너무 많이 나면..."


나를 부르며 소리치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도 그랬다. 내가 엄마 말을 잘 안 따르면 언제부턴가 심한 욕을 했다. 엄마는 절망 속에 감춰진 분노를 긴 세월 동안 조금씩 키워내고 있었다. 엄마를 좀 더 살폈어야 했나. 내가 너무 무심하진 않았나. 엄마를 병원에 두고 온 일로 죄책감이 몰려왔다.

지우 어머니한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인자한 미소를 띠며 공손하게 인사하는 지우 어머니가 딸에게 화난다고 욕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가 한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으니까. 그저 욕의 강도가 더 심하지 않기를 바라며 지우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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