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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웃는 아이 06화

문을 열고 나서면

by 꽃님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

슬퍼하거나 좌절한 상태에서 후회하지 말고 오히려 바쁘게 살면서 슬픔을 잊고 전진함으로써 슬픔을 치유하라! 한 때는 이 말이 내게 도움이 될 거라 믿었었다.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나를 몰아붙이며 살았다. 나를 붙잡고 끈질기게 놓지 않는 과거의 잔상들이 내 숨통을 조여올 때마다 난 온 힘을 다해 과거의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몹시, 아주 몹시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잠깐의 틈이 생기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고통의 기억이 또렷해지기 전에 무슨 수라도 써볼양으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해댔다. 열심히 산다는 건 참 고독하다. 나를 냉정하게 내몰며 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들과 다 관계를 맺진 않았다. 내 자신에게 매정할 정도로 인색했고 한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오빠 몫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일밤 눈물을 흘리며 오빠를 그리워하는 엄마를 위해서, 아니 어쩌면 그런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미친 듯이 공부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 전 과목 백점을 맞은 성적표를 엄마한테 보여줬다.


"넌, 이런 거 안 해도 돼."


라고 말하는 엄마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무 기대도 희망도 없는 눈빛, 내 성적표를 바라보던 엄마의 공허한 눈빛을 잊지 못한다.

오빠는 세 살 때 한글을 떼고 천자문을 다 외고 1부터 100까지의 수를 인지할 정도로 똑똑했다. 엄마 말을 빌리자면 세 살짜리가 엄마 얼굴을 제법 잘 그렸으며 손가락 힘이 좋아서 글씨도 또박또박 잘 썼다고 했다. 조금 과장되긴 했지만 그만큼 똑똑했다는 말로 해석했다. 오빠가 영재라고 생각한 엄마는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엄마표 한글부터 영어, 한자까지! 엄마가 가르치는 대로 오빠는 잘 배워나갔다. 오빠가 일곱 살 됐을 때 엄마는 영재들만 다닌다는 교육원에 가서 오빠를 영재성 검사를 받게 했다. 상위 0.01%라는 결과를 본 엄마는 바로 영재 교육원에 등록했다. 오빠는 일주일에 한 번 영재 교육원에 가서 3시간짜리 수업을 받고 왔다. 영재 교육원을 3개월쯤 다녔을 때 오빠가 수업을 받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화장실을 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았다. 엄마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그만 나오라고 했는데 그 안에서 오빠가 울고 있었다. 문을 열어 보라고 하고 엄마는 오빠를 화장실에서 억지로 끌어내려고 했다. 오빠는 화장실 문을 잡고 교실로 안 들어가겠다고 울며 불며 떼를 썼다. 하지만 엄마는 무섭게 다그치며 안 된다고 단호하게 꾸짖어 결국 오빠는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그때 오빠가 끝까지 화장실 문을 잡고 놓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오빠의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울고 조금만 더 버텼다면 그런 아들을 본 엄마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 인생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선생님, 저 너무 답답해요."


지우가 갑자기 자기 가슴을 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갑자기, 왜? 어디 아픈 거니? 엄마한테 연락할까?"


그러자, 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괜찮다고 했다.


"그냥, 하루종일 이 방 안에만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학교 갔다 와서 계속 방 안에만 있었거든요."


"오늘 수업이 많았니?"


"네... 선생님 오시기 전에 수학했고 선생님 가시면 바이올린 해야 하고요."


"힘들겠네. 어쩌지?"


지우가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느껴졌다.


'힘들면 엄마한테 힘들다고 말해. 참지 말고 말해야 힘들지 않아.'


란 말을 해주고 싶지만 내 권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 못했다. 대신 아주 잠깐 바깥공기를 맡게 할 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지우 어머니는 외출 중이고 내 수업이 다 끝나기 전엔 집에 오지 않으니 지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아이스크림 정도는 사 줘도 되지 않나 생각했다.


"지우야,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아이스크림이요?"


지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더니 일어나 방방 뛰며 자유를 찾아 탈출이라도 하는지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다.


"나가자!"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네도 타고 단지 내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잘 꾸며진 아파트 화단 앞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재잘재잘 떠들며 신이 난 지우가 아이스크림을 할짝할짝 야무지게도 먹는다. 지우가 이렇게 밝은 아이였는지 미처 몰랐다. 방 안에서 수업을 받을 때 지우와 지금 내 옆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지우는 다른 아이 같다. 지우를 볼 때마다 아련한 마음이 생긴다.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놀이터 옆에 나무로 만든 정자가 보였다.


"우리 가끔 나와서 저기 정자에 앉아서 수업해도 좋겠다. 저기 어때?"


하며 정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우는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기더니


"정말요? 진짜요? 그러면 선생님, 공부하다가 놀이터에서 놀아도 돼요?"


"그럼, 공부 다하고 놀면 되지. 호호."


"이렇게 나오니까 정말 좋아요. 기분 최고예요."


아이스크림을 다 먹는 동안 지우는 많은 말을 내게 했다. 며칠 있으면 생일인데 생일 선물로 엄마가 판다마우스를 사준다고 한 것과 할머니가 허리 수술을 해야 해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할머니가 키우던 앵무새를 며칠 있으면 집으로 데려온다는 것,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아 설렌다. 지우와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졌다. 지우를 집으로 데려다주는데 지우가 내 손을 잡았다. 마르고 작은 손이 내 손안에 들어와 안겼다. 차갑던 지우의 손이 점점 따뜻해질 때 지우 집에 도착했다. 지우를 들여보내고 돌아서 나오는데 낯익은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흰색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고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느리게 걸어오는 사람은 바이올린 선생님이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중얼거리며 걸어왔다.


"응, 나 이제 한 명만 하면 끝나. 거기서 봐. 그래, 얘? 그렇지, 뭐. 애가 좀 이상해. 정상은 아닌 것 같아. 얼른 끝내고 갈게. 기다려."


내 옆을 지날 때 분명하게 들렸다. '정상은 아닌 것 같아'란 말이 거슬렸다. 괜스레 기분이 나빴다. 마치 내 애를 흉보는 것만 같았다. 당장 쫓아가서 무슨 말이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순간 욱하고 올라왔지만 그냥 그 선생 뒤통수를 한번 째려보는 걸로 대신하기로 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를 하고 거실에서 TV를 보다 잠들었다. 요즘 들어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한두 시간 자다 깨서는 정작 침대에 누워 잠들려고 하면 잠이 오지 않아 뜯눈으로 밤을 새운다. 잠에서 깨어 습관처럼 휴대폰 문자를 확인한다.


선생님, 시간 나실 때 전화 주세요.

지우 어머니의 문자가 와 있었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걸어가서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정신을 차린 다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최대한 밝은 목소리 톤으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선생님, 혹시 오늘 지우 데리고 밖에 나가셨어요?"


전화기 너머 지우 어머니 목소리가 오늘따라 차갑게 들렸다.


"네... 잠깐, 나갔다 왔는데요."


지우 어머니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선생님. 그러시면 안 되죠. 제 허락도 없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시면 어떡해요? 제가 선생님께 드리는 수업료는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걸로 드리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애를 데리고 나가서 놀라고 드리는 게 아니라고요."


꽤 차분하게 말을 하던 지우 어머니는 결국 말을 하면서 말속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수업은 다 하고 지우가 답답하다고 해서 잠깐 나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먹이고 들여보냈어요."


"왜 선생님 마음대로 애한테 아이스크림을 사 준 건데요? 선생님은 그냥 수업만 하고 가시면 되잖아요. 선생님 가시고 나서 바이올린 선생님이 수업하기 너무 힘들었대요. 애가 수업하기 싫다고 떼를 너무 써서 저한테 연락을 하셨어요."


"어머니, 지우한테 아이스크림 사 준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것 때문에 지우가 바이올린 수업을 거부했다고 보긴 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지우 수업은 그만하겠습니다. 솔직히 선생님 지우 대하는 태도며 말투가 너무 아이 다루듯 하세요. 전에 선생님은 지우를 어른 대하듯 말했거든요. 자료도 많이 뽑아 오셔서 읽게 하고 지우도 자길 어른스럽게 대하는 걸 더 좋아하고요. 조금 두고 보다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요. 선생님과는 인연이 아닌 것 같아요."


지우 어머니와의 통화는 친절한 말투지만 무례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아쉽게도 지우를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내 능력을 의심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하기보다 지우 손톱에 예쁜 해바라기를 그려준다는 약속도 날씨 좋은 날 정자에 앉아서 수업을 하자는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더 속상하다. 그리고 지우에게 마지막 인사를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지우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준 날이 마지막으로 지우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마음이 어수선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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